첫 번째 규칙
rookie.rebel
여전히 이른 아침. 손끝이랑 발목까지 스며드는 서늘한 안개가 저택을 온통 감싸고 있었다. 퀴퀴한 흙냄새, 축축하게 젖은 잔디. 나는 무심히 여행가방 손잡이를 쥐고, 녹 슬어 얼룩진 철제 대문 앞에 멈춰섰다. 숨을 들이쉬고 문득 허공을 바라봤다. 등 뒤에서 간간이 짐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고, 저택 내부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문 위에 얹힌 철제 장식에 손가락 끝이 닿았다. 차갑다. 내가 깊은 곳에서 오래 고민하던 침묵과 비슷한 온도.
누군가 저택 쪽에서 다가오는 발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안개 속을 가르듯 다가오는 남자. 아드리앵 르베르.
까만 코트 자락, 말끔하게 정돈된 검은 머리, 아무 표정 없는 얼굴. 그의 움직임은 무슨 기계처럼 침착했고, 심지어 그림자마저 일정한 속도로 내 앞에 다가왔다.
“벨레루스 아드릴 씨.”
그는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에 온기는 딱히 없었지만, 정중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부터...”
“예상보다 일찍 오셨군요.”
아드리앵은 곧장 커다란 쇳문을 열었다. 무게를 실어 당기자 문이 순순히, 그러나 오래된 경첩 소리를 담아 천천히 열렸다. 안개 너머로 고압적이고 우아하게 늘어선 저택의 외관이 드러난다. 어딘가 예의가 지나치게 철저해 너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가방을 끌며 천천히 그를 따라 저택 안쪽으로 들어섰다. 흙 묻은 신발이 오래된 돌바닥 위를 스치며 둔탁하게 울렸다.
“저택은 아침 7시에 문을 엽니다. 출입하는 문, 창문, 부엌, 복도 모두 집사의 허락 없이 열면 곤란합니다.”
아드리앵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규율을 읊조리듯 일관된 톤. 그가 한 발 뒤에서 나를 힐끔 바라봤다.
“외부인과 접촉하는 것도 최소한으로만 해주시길 바랍니다. 저택의 사정상... 불필요한 흔적이 남는 걸 싫어하십니다.”
“그럼, 편의점 가기도 허락받아야 하나요?”
나도 모르게 피식,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스쳤다.
아드리앵은 별 감정 없는 듯 내 쪽을 스쳐보고는,
“원하신다면 몇 가지 편의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택 밖에서 만나는 사적인 일은 가급적 삼가주십시오.”
잠시, 바람이 불었고, 아드리앵의 코트 자락이 조금 들렸다. 그 한기마저 저택에선 규칙처럼 느껴졌다.
함께 대리석 계단을 오르며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왼편 높은 창 너머에, 누군가 서 있는 그림자가 느껴졌다. 실루엣만 짙은 금빛이 유난히 날카로웠다. 시선이 마주친 건 잠깐, 창문에 손가락이 닿자 그림자는 이내 사라졌다.
저게… 레오 드 라루엘?
처음부터 대면은 거부하는 건가. 아니, 오히려 관찰하려는 거겠지. 나는 얼핏 그런 기분을 했다.
안개가 슬며시 저택 홀 안으로까지 밀려드는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에 소스라쳐 돌아보니, 아드리앵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내 앞에 섰다.
“짐은 안내드릴 방에 옮겨놓겠습니다. 불편한 점은 말씀해주시고요.”
시선이 내 손가락에 잠깐 머물렀다. 얼룩져 있던 내 손 등, 그리고 손톱 밑 저미는 긴장까지.
“여기서는… 익숙하지 않은 소리와 기운이 많을 겁니다. 빠르게 적응하셨으면 좋겠군요.”
그의 말에 숨은 의미를 굳이 캐지 않았다. 그냥 고개만 끄덕이며 조용히 뒤따랐다.
홀을 지나, 오래된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돌았다. 우아한 샹들리에, 거대한 벽화, 바스락거리는 과거의 냄새. 모든 게 나를 가만히 압박했다.
스스로를 방어하듯 어깨가 저절로 굳어졌다. 이 낡은 곳, 사람보다 시간이 많을 듯한 분위기.
내가 또 한 번, 속으로만 작게 한숨을 뱉었다.
지금 이 순간이 앞으로 어떤 시작이 될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아드리앵이 걸음을 멈추더니, 손끝으로 복도 끝의 커다란 문을 조심스럽게 가리켰다.
“여기가 앞으로 벨레루스 씨가 머무르게 될 방입니다. 침구류, 세면도구, 기본적인 생필품은 준비해 두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몸을 숙여 인사를 건넨 뒤, 가방을 들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무겁고 오래된 나무문이 둔탁하게 닫혔다.
안쪽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햇살이 스미지 않는 벽지, 세월의 얼룩이 스며든 마룻바닥, 앤티크 서랍장 위에 손질되지 않은 거울.
창문을 조금 밀어보니, 거미줄과 먼지가 묻어 손끝이 저려왔다.
나직하게 숨을 뱉자, 방 안 공기는 묘하게 눅눅하고 차분했다.
천장이 생각보다 높아서, 작은 소리도 맴돌 듯 남았다.
문득, 아드리앵의 그림자가 문 아래로 길게 드리웠다.
“정해진 시간 외에는 저택의 북쪽 부속동이나 지하 쪽 복도엔 들어가면 안 됩니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낮게 울렸다.
“질문이나 불편한 점 있으면 곧장 부르십시오. 필요하다면… 차 한 잔 준비해 드릴 수도 있고요.”
나는 문턱에 가방을 내려놓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용히 대꾸했다.
“굳이 신경 안 쓰셔도 괜찮을 겁니다.”
낯선 공간에서의 어색함, 그리고 낯선 이의 지나친 친절이 오히려 경계심을 자극했다.
아드리앵은 잠깐 침묵하다,
“그럼, 정식으로 환영합니다. 벨레루스 씨.”
딱딱하게 끊긴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복도의 적막만, 오래 남았다.
방 안에 홀로 남으니, 이제야 마음 한구석이 약간 느슨해졌다. 나는 천천히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안개에 젖은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든다. 먼지 속에서 묵은 향기가 올라왔다. 거울 위에 손자국을 그리며 몇 번 문질렀다.
내 얼굴, 창백한 광대뼈와 밑그림만 남은 듯한 표정. 익숙하되 멀게 느껴지는 상. 그때, 정원 쪽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누군가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섬세하고 먼, 그러나 어딘가 날카롭게 울리는 선율.
나는 문득 귀를 기울였고, 손끝에 힘을 빼지 못했다.
문 너머에, 그리고 안개 건너에, 나를 시험하려는 듯한 저택의 기척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나는 짧은 숨을 고르며, 방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었다.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방 안에는 뿌연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얇은 커튼 너머로, 피아노 소리가 낮고 길게 여운을 남기며 이어졌다. 단순한 연습곡 같았지만, 중간중간 불쑥 끊어졌다가 거칠게 이어지는 부분에 의외로 강한 집념 같은 게 섞여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새삼 두 손을 바라봤다. 얼룩진 손등에 저택의 먼지, 창문을 문질러 남겨진 자국, 그리고 여기서 처음 마주한 침묵이 묻어나는 듯했다. 한 발짝 물러나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오래 묵은 책이 비뚤게 쌓인 책장, 세월에 닳은 손잡이. 직접 아무것도 만지기 전인데도, 이 공간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피아노 소리는 곧 짧게 멎었다. 다시 몇 초간 완연한 적막. 그제야 심장이 두세 번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릴 만큼 고요했다. 나는 방 안을 비집고 돌아다니는 듯한 공기의 흐름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문득, 등 뒤 낡은 서랍장 위 작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손끝으로 조심스레 상자 뚜껑을 쓸었다. 먼지와 함께 보슬보슬한 나무 결이 감촉을 전했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오래된 열쇠 하나와 반쯤 말라붙은 작은 라벤더 주머니, 그리고 희미하게 빛 바랜 명함이 있었다. 명함에는 익숙지 않은 필체로 ‘R. de Laruelle’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름뿐인 이 작은 종이에서 나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이 저택 주인, 처음부터 이렇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자리를 피해버린 의도는 뭘까?
내가 잠시 멍하니 서 있을 때, 복도 끝 어딘가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문틈 사이로 낮은 대화 소리—익숙하지 않은 기조의 목소리와, 아드리앵 특유의 차분한 어투가 엇갈렸다. 그들은 내가 있는 방 쪽으로 오진 않았고, 짧은 몇 마디 뒤에 소리는 금방 멀어졌다.
나는 의자에 앉아, 명함을 반복해서 뒤집었다 폈다. 손끝에서 종이가 가볍게 구겨지고 펴지기를 거듭했다.
낮게 깔린 불안이, 묘하게도 약간의 호기심과 뒤섞였다. 이 저택, 그리고 이 집의 주인은 나를 어디까지 시험할 생각일까.
밖에서는 다시 피아노 건반을 손끝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우울한 여운으로 퍼졌다. 난, 오늘이 지나기 전에 도무지 이 공간에 완전히 놓일 수 없을 거라는 걸, 막연하게 느꼈다.
손에 쥔 명함을 천천히 서랍에 넣으며, 안개로 젖은 아침 냄새가 내 마음속까지 깊숙이 스며드는 기분을 한 번 더 곱씹었다.
그때, 방문 쪽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단 한 번, 아주 가볍게.
나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숨만 조심스럽게 들이쉬었다.
밖에서는 다시 아무 말도 없다.
이것이 단순한 환영의 신호인지, 아니면 또 다른 경계의 시작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잠시,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기척조차 들리지 않았다. 쥐고 있던 손이 저려올 때쯤, 또 한 번, 이번엔 더 분명하게 노크 소리가 났다. 벨레루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숨을 삼키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미끄러웠다.
문고리를 잡은 채 조심스럽게, 아주 조금 문을 열어봤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미지근한 빛 한 줄기가 어둑한 방 안으로 번졌다. 문틈 사이로, 사이드 테이블 위에 습기 찬 찻잔 두 개와 흰색 도자기 주전자 하나가 놓인 쟁반을 든 아드리앵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읽기 어렵게 무표정했다.
“따뜻한 차 드시겠습니까. 이른 아침엔 내습이 심해서— 몸을 덜 상하게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일부러 방 안까지 들이지 않은 채, 쟁반을 문 앞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손끝 움직임조차 과하게 조심스러웠다. 무표정한 얼굴 그늘 아래에서, 잠깐 시선이 벨레루스의 얼굴과 손끝을 번갈아 스쳤다.
벨레루스는 간단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직 어색하네요. 이런 대접은…”
아드리앵은 작은 미소 비슷한 것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집의 규칙만 지키신다면, 불필요한 오해나 사건도 한결 줄어들 테니까요.” 그의 말투와 눈빛 모두, 자연스럽게 권유와 경계가 한데 묻혀 있었다.
벨레루스가 찻잔을 들어 올리는 짧은 순간, 저 멀리 복도의 빛이 잠깐 흐려졌다. 복도 끝, 난간 너머 어딘가에서 또 다른 기척— 가느다랗고 빠른 무언가 스치듯 지나갔다. 금방이라도 저택이 새로운 하루 속으로 벨레루스를 집어삼킬 것 같은, 무겁고 차가운 공기.
문득, 아드리앵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벨레루스 씨.” 그 목소리는 한층 더 낮고 단호해졌다. “이 집에는 밖에서 오해하거나, 섣불리 생각하실 만한 일들이 꽤 있습니다. 시끄럽거나, 불필요한 흔적을 남기는 일—특히 북쪽 복도에선—삼가주시길 바랍니다.”
벨레루스는 대답 대신 찻잔을 천천히 입술에 가져다댔다. 라벤더와 무엇인지 모를 허브 내음, 그리고 낯선 긴장이 동시에 퍼졌다. 복도 저편 어딘가에서 뚜벅, 뚜벅, 발소리가 줄어들다 멎었다. 그 방향엔, 방금 전 그 금빛 머리의 실루엣이 서 있던 창이 있었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는 순간, 벨레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란 한기와 불안을 되새겼다. 등 뒤로 스며드는 아침 냉기, 그리고 저택 전체를 감도는 침묵이 한 꺼풀 더 두꺼워졌다.
아드리앵이 마지막으로 짧게 인사하고 천천히 뒤돌아섰다. 복도 벽시계가 길고 낮게 댕— 하는 소리를 잇따라 울렸다. 문 위로 길어진 그림자가 사라지자, 공간에는 다시 텅 빈 정적만 남았다.
벨레루스는 쟁반 위 명함과 열쇠, 그리고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온 자신을, 어색하게 내려다봤다. 이제 막 이 저택에 들어선 시간임에도, 뭔가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듯한 기분이 스믈스믈 배어들었다.
문밖에서, 아주 미세한, 천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누군가—조심스럽게, 그러나 명확하게, 복도 끝에서 여전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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