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Episode 1

fragrant Hammerhead shark 53

아침 공기는 미묘하게 딱딱했다.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거리를 가르는 자동차 소리가 귓가에 일정한 패턴으로 이어졌다. 늘 혼자 다니는 구불구불한 골목 사이를 걸으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어젯밤 남편이 두고 간 컵잔의 얼룩을 떠올렸다. 싹 닦아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에 남아있는 흔적. 내 안의 공허도 늘 그런 식이었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자, 두툼한 외투를 맞춰 입은 젊은 부부가 옆에 섰다. 남자는 스마트폰을 흘끔거리며, 여자는 커다란 에코백에 손을 꼭 쥐고 있다. 가로등이 바뀌자 둘이 동시에 발을 디디는데, 짧은 눈빛을 주고받는 그 익숙한 제스처가 이상하게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내가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도 저런 시간이 있었을까. 이제는 서로의 체온에도 쉽게 놀라지 않게 됐으니, 시간이라는 건 잔잔한 권태로 이어진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좋은 아침이에요.” 앞마당에 쪼그려 앉아 꽃잎을 다듬던 할머니가, 손끝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내며 말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예쁘게 피었네요.”

“글쎄, 피긴 피었는데도 왜 이렇게 허전한지. 나이 들어도 그걸 모르겠나 봐.”

나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 할머니의 말마저 내 심경의 변주처럼 느껴졌다. 허전함은 나이와 상관없다고,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문제라는 듯이 공기가 차갑게 흔들렸다. 한참을 걷다가, 오래된 벤치에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신문을 뒤적이고 계셨다. 나지막하게 고개 숙이고 계신 그 모습에는, 무게가 아니라 빛도 조금 얹혀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간단히 오늘의 산책 소감을 메모장에 남겼다.

‘공허는 언제나 주변에 잠복한다. 흐릿한 대화, 반복되는 거리, 나와 타인의 표정 틈.’

정류장으로 향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지나가다 “오늘도 글 써요?” 하고 묻는다.

나는 피식 웃으며,

“네. 늘 쓰지만 늘 모자라네요.”

짧은 웃음 뒤, 그녀는 외투 단추를 채우며 바람을 피해 버스 정류장으로 종종걸음친다. 그 뒷모습이 왠지 모를 안쓰러움과 해방감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던 것들—남편과의 아침 식사, 카페에서 나누던 익숙한 농담, 누군가는 매일 잊혀가는 표정들—그 모든 사소함이 내 글을 채울 만한 무늬가 되어준다는 사실이, 갑자기 조금은 다정하게 느껴졌다.

길 건너편에서 오래된 책방의 간판이, 아침 햇살에 희미하게 반사된다. 오늘은 아마도, 평범하게 흘러가는 하루일 테다.

나는 발걸음을 다시 돌리며, 벤치 오른편에 앉아 가방 속 공책을 꺼낸다. 내가 관찰자로 남을 수 있는, 이 차가운 계절의 짧은 틈.

연필을 쥔 손끝에 느껴지는 묘한 떨림이 마음 한구석을 간질였다. 아침 산책에서 얻은 단어들, 내부의 균열, 남모르는 갈증—all of this quietly settling into a page, waiting for something unexpected to begin.공책을 펼치자, 지난주에 아무렇게나 적어뒀던 문장 조각들이 흐릿이 남아 있었다. ‘어디까지가 나였을까’, ‘사랑의 껍질은 얼마나 단단한가’—그런 질문들이, 아직 덜 마른 잉크처럼 무심히 흐려졌다. 잠깐 연필을 손바닥에 굴리며 벤치 등받이에 기댄다. 아침 햇살은 여전히 희미하지만, 볼을 지나는 기운만은 조금씩 데워지고 있었다.

한쪽에서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진다. 아이들은 서로를 밀고, 다투다가 금세 웃으며 주저앉는다. 그 사소한 다툼과 금세 풀리는 화해의 리듬이 어딘가 멀게 느껴져 조금 오래 바라보았다. 시간을 거슬러, 나 역시 그저 단순했던 때가 있었을까—그 생각이 왠지 쓸쓸하면서도 위태롭게 다가온다.

공책 위, 연필이 저절로 움직였다.

‘매일 반복되는 익명의 하루 속, 나는 무엇을 기어이 기억하려 하는가. …’

문장을 멈추던 손등에 갑자기 가벼운 진동이 퍼졌다.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다.

‘레이카 교수님: 오늘 저녁 강연, 참석 가능하신가요? 꼭 뵙고 싶은데…’

순간, 머릿속에 미묘한 파문이 일렁였다. 일정표에는 이미 써두었던 강연. 아무런 기대 없이 이름만 써둔 그 자리. 나는 조금 뜸을 들인 뒤, 짧게 ‘네, 가겠습니다’라고 답장을 남겼다. 이유도 모른 채, 오늘 하루에 작은 금 하나가 생겨나는 듯한 조용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누군가의 초대, 타인의 세계로 한 발 나아가는 느낌—나는 공책을 덮고 가방을 정리했다. 흩날리는 먼지와 햇살, 이른 오후의 공기 안에 알 수 없는 기대가 잔잔하게 부유하고 있다.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변화, 그 서늘한 예감 아래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발 아래로 기우는 햇살이 바닥의 타일 틈 사이를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새로운 결심이랄 것도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나는 짙은 코트를 여미며 골목을 벗어났다. 먼 곳에서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서고, 사람들은 익숙한 속도로 오르내린다. 그 풍경 속에 휘말릴 듯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막연히 귓가를 스치는 단어들과 이따금 떠오르는 미완의 문장들이 서로 뒤엉켰다.

길가에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감귤을 진열하는 노점상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온다. 버석거리는 손등, 쓸쓸하면서도 견고한 삶의 태도. 나는 잠깐 그 앞을 맴돌다가, 작은 봉지 하나를 건네받는다. 상점 주인은 “아침엔 시고, 점심 지나면 조금씩 달아져요,” 하고 덤덤한 미소를 짓는다. 그의 말끝에 실린 농담 아닌 농담이, 나를 어딘가 낯선 안도감으로 감싼다.

가방 속에서 감귤이 뒹굴고, 나는 잊지 못할 맛을 기대하지 않은 채 운동장 옆길을 돈다. 운동장에서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줄지어 한 달음에 달린다. 저마다 자기 속도로, 어떤 질서도 없는 듯 섞여 있는 그 모습이 오래 눈길을 끈다. 아이들의 숨 가쁜 뛰어다님은, 내가 예전에는 꿈꿀 수 있었던 모종의 무질서와 자유 같은 것으로 느껴진다.

한참을 걷다, 전봇대에 기대 선 채 하늘을 올려다본다. 두꺼운 전선 뒤로 하얀 구름 한 조각이 느릿하게 이동한다. 잠시, 생각이 멈춘다. 오늘 저녁 강연은 내 일상의 어느 틈을 파고들게 될까. 그곳에서 어떤 공기가, 어떤 표정들이, 나를 또다시 흔들어 놓을까.

잠깐, 주머니 속의 감귤을 손바닥에 만지작거린다. 아무 뜻도 없지만, 그것이 오늘 하루의 예기치 않은 무게처럼 느껴진다. 도로 건너편 작은 카페의 창가에 낯익은 그림자가 스쳐지나간다. 이 도시는 언제나, 아주 작은 우연들로 하루를 매듭짓는다.

나는 오늘, 아침의 손끝에 머물던 미묘한 떨림이 저녁까지 옅어지지 않으리란 것만 어렴풋이 예감하며,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골목 저편에서 자전거 벨 소리가 희미하게 울리고, 시계 바늘은 느릿하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사거리 모퉁이에 다다라 서자, 하늘빛과 가로수 그늘이 바닥에서 얼룩처럼 겹쳐졌다. 나는 잠시 멈춰서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고요히 제 자리에서 꿈틀거리는 순간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바람이 머리칼 사이를 파고들며, 어쩐지 심장이 느리게 꺼졌다 뛰듯, 온몸을 살짝 긴장시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익숙한 진동음이 다시 손끝을 자극했다. 이번엔 가족 단톡방 알림. 조용히 스크린을 밀어 올리자, 남편이 보낸 저녁 식사 메뉴 사진과 짧은 이모티콘이 떠 있다. 어색함 없는 평온, 불필요하게 친절한 문장. 나는 답을 미루다, ‘저녁엔 늦을 것 같아요. 강연 다녀오겠습니다’라고만 남긴다.

잠시 카페 창가로 걸어가,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의 표정을 훔쳐본다. 모르는 연인들의 웃음, 혼자만의 커피잔, 신문을 넘기는 노인의 손끝. 각각의 시간이 내 안에서 저마다의 온도로 교차한다. 문득, 내 시선이 창가에 기대 앉은 한 남자에게 멈춰선다. 그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스케치북을 펼친 채 무언가에 몰두해 있다. 이따금 손목을 툭툭 털고, 깊은 생각 끝에 연필을 멈추는 버릇이 있구나—나는 그렇게, 아무 이유 없이 타인의 작은 습관을 오래 관찰한다.

앉아 있던 벤치로 되돌아와 한숨을 길게 내쉬자, 귓가로 약한 음악 소리가 스며든다. 근처 꽃가게에서 라디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건너편 감귤 상인과 꽃가게 주인이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주고받는, 작고 평화로운 조각들. 그들만의 암호처럼 오가는 대화 속, 나는 잠시 궁금증과 소외감이 동시에 밀려드는 것을 느낀다. 저 안온한 삶의 리듬에 나도 섞일 수 있을까, 혹은 늘 그저 관찰자로 남는 것일까.

가방끈을 한 번 고쳐 쥐고, 카페에 들어갈지 망설인다. 강연 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실까. 손끝에 감귤 껍질의 상큼한 냄새가 배어드는 순간, 문득 두근거림이 새로이 찾아온다. 작은 선택이, 마치 이정표처럼 오늘 하루의 결을 은근하게 바꿔놓을 것만 같다.

출입문 앞 투명 유리에 비친 내 표정이 어쩐지 낯설다. 나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선다. 바깥 풍경이 한 겹 유리 너머로 무뎌진다. 낡은 테이블 위에 흐린 빛이 내려앉고, 주변의 잔음과 커피향이 느릿하게 퍼진다.

이 작은 중간 지점—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모든 것이 잠깐 멈춘 것 같은 고요를 느낀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결심 끝에 주문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만은, 모르는 얼굴과 낯선 순간들을 좀 더 세밀하게 받아들이기로, 스스로에게 말없이 약속하면서.주문대 앞에 서자, 바리스타가 나를 한 번 쳐다보고 익숙한 듯 가볍게 미소 짓는다. “아, 오랜만이네요. 평소처럼 블랙 커피로 드릴까요?”

나는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오늘은 조금 진하게 부탁드릴게요.”

그는 주문을 다시 확인하고,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다. 조용한 카페의 공기에는 은은한 원두 향이 겹겹이 쌓인다. 나는 주머니에서 막 구입한 감귤 한 알을 꺼내,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긴다. 과육이 드러나며 순간 상큼한 향이 테이블 가득 퍼진다. 그 작은 감각이, 예기치 않게 마음 한구석까지 시원하게 스며든다.

잠시 후, 핸드드립 커피잔이 내 앞에 놓인다. 표면에 잔잔한 거품이 떠 있고, 나는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는다. 쌉쌀한 기운이 입안에 맴도는 사이, 창 밖으로 흩날리는 햇살과 겨울바람을 차분히 바라본다.

주변에는 각자 책을 읽는 사람,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대학생, 누군가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노부부가 있다. 나는 그 사이에 섞이지 못한 채, 그러나 이상스럽게 편안한 거리감으로 이 풍경을 바라본다. 가끔, 혼자가 된다는 건 고요의 한 중심에 닿는 일 같다.

커피잔 아래 메모지를 펼쳐, 아까 적다 만 문장을 다시 떠올린다. ‘반복되는 하루의 익명성 속, 내가 꿈꾸는 자유는 구체적인 얼굴이 있을까.’ 고요한 생각의 틈을 적어내려가며, 나는 오늘 저녁의 강연 장소와 아사노 레이카 교수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굴려본다. 그 이름이 내 일상 너머, 다른 결의 리듬을 예고하는 것만 같아 왠지 모를 긴장이 느껴진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창가 끝자락에 앉아 있던 남자가 시선을 들어 나와 눈이 맞닿는다. 짧은 순간, 그는 약간 놀란 듯하다가 이내 미묘한 웃음을 짓는다. 스케치북을 덮으며 테이블 위에 연필을 툭 내려놓는 손끝, 움푹 패인 손등의 흉터, 그리고 낯선 듯 익숙한 호기심이 스치는 눈빛. 우리는 아무 인사도 주고받지 않았지만, 눈길만으로 짧게 안부를 나누는 느낌이 든다. 마치 서로가 이른 아침, 같은 도시에 머문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나는 곧 시선을 돌려 메모지를 다시 쥔다. 하지만 연필 끝이 종이 위를 맴도는 동안, 문득 그 남자의 잔상이 내 안에 오래 남아 떠나지 않는다. 평소라면 금세 잊고 말았을 타인의 표정이 오늘 따라 이상하도록 선명했다. 이 작은 동요가 오늘 하루의 결을 바꿀 수 있을까—나는 천천히 감귤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생각이 얕은 강물처럼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밖에서는 오후가 한 층 깊어지고, 커피잔 위 조용한 온기가 사라져간다. 단지, 아주 조금 지금의 나에겐 미지의 시간이 문턱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예감만이, 미묘한 긴장감으로 손끝을 흔들고 있었다.

Up next
✦ You're all caught up

This is the latest published episode.

The author is still writing — get notified so you never miss a chapter.

경계 위의 갈증

경계 위의 갈증's Story Chat

Want to chat with ?Chat with this story's characters — an AI conversation in their own voice.
message icon

More episodes

View More
경계 위의 갈증top serial

경계 위의 갈증

fragrant Hammerhead shark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