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의 밤2
stately Yellow-billed Spoonbill 88
“정말 내 작업실을 하루 써보고 싶어?”
미라가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듯 멈췄다. 바깥에선 저녁 빗줄기가 어둑한 골목벽을 조용히 치고 있었고, 오래된 아파트 복도 특유의 싸늘한 공기가 어깨 너머로 스몄다. 나는 덤덤한 척 운동화로 바닥을 한번 툭, 찼다.
“아니, 네가 내 그림 그리는 거 직접 옆에서 보는 것도 좀 색다른 일이고. 뭐,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오늘 하루만. 내 작업실, 대여 서비스.”
괜히 익살스러운 말투로 머리를 뒤로 슬쩍 넘겼는데, 미라는 미묘하게 입꼬리가 흔들릴 뿐 별 반응이 없다. 멋쩍게 심호흡 한 번 하며 키로 문을 돌렸고, 따뜻한 공기가 안쪽으로 밀려나왔다.
작업실 안은 온통 낡은 나무 냄새와 아크릴 물감 특유의 날카로운 향기로 가득했다. 커다란 창 아래엔 오래된 이젤 두 개, 삐져나온 스케치북 더미, 무릎담요가 아무렇게나 걸쳐진 소파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모노톤 책장엔 마른 꽃다발, 미완성 드로잉들이 어수선하게 꽂혀 있다.
“이렇게 흩어져 살아도 돼?”
미라가 블라우스 소매를 조심스럽게 걷으며 책상 위 연필꽂이를 이리저리 돌렸다. 조명에 반사된 그녀의 옆모습, 자주 본 얼굴인데 오늘따라 낯설다.
“살아, 뭐. 예술가들은 어수선한 게 매력이라잖아.”
나는 스케치북 더미를 옆으로 옮기며 소파에 그녀를 앉혔다.
둘 사이에 익숙한 침묵이 잠깐 흘렀다.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머리에 맴돌지 않는다. 손끝으로 소파 천을 만지작거리며 내가 먼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네 공간에 들어가는 것도 좀 어색할 줄 알았는데, 네가 내 작업실에 있는 건 더… 이상하게 기분이 이상하다.”
미라는 아무 대꾸 없이 창밖을 슬쩍 바라보았다. 비 쏟아지는 소리가 창호 위에서 은은하게 번진다.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넌, 내가 여기 오길 진짜 원했어? 솔직하게.”
‘진심은 어떨까’. 내 속마음은 점점 더 복잡하게 엉켜갔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스케치북 한 장을 조용히 넘겼다.
“응. 네가 내 분위기 감 잡아주면 더 잘 그려질 것 같았어. 내 작업실 냄새, 네가 뭐라고 할지 궁금했고. 음… 그냥, 좀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달까.”
미라의 표정이 미묘하게 풀리는 것 같다.
책상 위에 올려진 조그만 도자기 잔을 만지며 그녀가 중얼였다.
“여기, 생각보다 네 흔적이 많네. 네가 내 사적인 공간에서 뭔가 사라지면, 그게 꽤 불안하더라.”
잠시 시선이 부딪히자, 전에는 느낀 적 없는 낯선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손톱 끝을 무의식적으로 만지작거리며, 도로 스케치북에 시선을 뒀다.
“그럼, 시작해볼까? 네가 여기 있는 동안 뭘 그리고 싶어?”
미라는 창가에 서서 어두운 도시 풍경을 바라봤다.
오피스 빌딩의 창문 불빛이 비에 번지고, 저 멀리서 드문드문 차량 소음이 들린다.
나는 무릎 담요를 살짝 들어 소파 옆에 덮었다.
“기분이 좀 이상하다.”
미라가 말끝을 흐리더니, 조심스럽게 내 쪽을 본다.
“난 네 작업할 때 이런 식으로 곁에 있은 적이 없으니까… 뭔가 방해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야. 네가 있으면 오히려 여기가 진짜 집 같아져.”
둘 다 잠깐 웃었다.
그녀가 천천히 책장을 둘러본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자락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한 손은 조심스레, 미완성 드로잉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여기서 혼자 있을 때랑, 나랑 있을 때랑 달라?”
익숙하게 던지는 듯한 말투였지만, 문장 끝에 약간의 흔들림이 맺혔다.
나는 망설였다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달라. 네가 있으면―”
순간,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이상하게 솔직해지기가 어렵다.
“...네가 있으면, 내가 뭔가를 다시 시작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 네가 내 옆에 있으면,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안 망가졌다고 믿고 싶어져.”
미라는 시선을 못 받고 있다가, 서서히 나에게 얼굴을 돌렸다.
비 냄새, 짙은 물감 향, 나무와 커피 찌꺼기 냄새가 뒤섞여 의외로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녀가 조심스레 묻는다.
“그래도… 오늘은 내 소원 들어주는 날이기도 하지 않아? 네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 있으면, 불러줄까?”
나는 키득,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미라, 서른넷에 기타 치는 상담사. 괜찮다, 나 오늘 너랑 이야기만 해도 충분해.”
창밖에 시선이 닿을 무렵, 두 사람 사이의 숨소리만 따라 흐른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어도, 오늘은 그 침묵이 오래도록 낯설고 부드럽다.
조용히, 저녁이 깊어간다.잠시 고요가 이어지다가, 미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비에 젖은 유리창에 손끝을 가볍게 대던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리듯 빛바랜 조명을 등지고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실루엣이 작업실 가득 쏟아진 그림자 사이로 부드럽게 퍼진다.
“세현아, 네가 이 공간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겠어. 벽에 걸린 저 낡은 스케치—아직 완성 안 했지?”
그녀가 손짓으로 창 옆 작은 캔버스를 가리킨다.
나는 잠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계속 다듬기만 하다가 멈췄어. 마음에 안 들면 망설이고, 또 덮어두고.”
미라는 천천히 벽 쪽으로 다가와, 그림을 아주 가까이에서 들여다본다. 그녀의 손가락이, 액자를 감싸며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지우기 전에, 나중에 네가 두 번쯤 다시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목소리가 아득하게 잦아들다, 뭉근해진다.
나는 한참 대답을 망설였다. 노곤한 빗소리, 물감 냄새, 미라의 손 끝이 내 오래된 흔적 위를 타고 흐르는 상상—이 모든 게 문득 선명해졌다.
“가끔. 네 의견을 듣고 나면 좀 더 해볼 걸 싶다가도… 그냥 놔두고 싶을 때도 많았어. 완벽하지 않은 게 오히려 이 공간에는 어울릴 때가 있거든.”
미라가, 그 말에 조용히 미소 짓는다.
캔버스 앞에 서 있는 그녀의 높고 곧은 어깨가 잠깐 느슨해진다.
“그럼 오늘, 그 그림 옆에 네가 새로 그리고 싶은 걸 그려봐. 아무렇게나. 내가 옆에 앉아서, 지켜볼게. 내내 혼자 그리던 네 표정, 오늘만큼은 같이 보고 싶으니까.”
나는 대답 대신, 스케치북 하나를 조용히 집어 들었다.
손에 묻은 흑연 자국, 차가운 연필심이 익숙하게 손끝을 스쳤다.
소파의 미라가 잠시 숨을 고르고, 담요 자락을 꼬아 쥐며 내 어깨 쪽으로 조용히 몸을 기댄다. 빗소리가 더 크게 창을 때린다.
그 작은 거리―마치 말로 옮길 수 없는 경계 위.
눈앞 도화지는 아직 비어 있고, 미라의 손길과 숨결이 조심스레 그 위로 드리운다.
나는 천천히 연필을 들어, 하얀 종이 위에 첫 선을 긋는다.
그 순간,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한다.
익숙해서 더 어색한, 어색해서 더 솔직한 밤.
그리고,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는 공기에 조용한 기대감이 배어든다.
미라가 작게 속삭인다.
“다 그리면… 나도 오늘 내 이야기, 조금 해도 돼?”
그 목소리엔 잠깐의 망설임과 숨겨진 무언가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채 스며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온 신경이 종이 위와, 내 옆의 그녀에게로 곤두서기 시작했다.
그 밤, 아무도 그 끝을 모르는 대화와 그림이, 침묵 속에서 천천히 시작되고 있었다.

소원의 밤

소원의 밤3
친구였던 우리가 소원을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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