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エピソード1

소원의 밤

stately Yellow-billed Spoonbill 88

비가 쏟아지던 밤. 이태원 골목은 늘 그렇듯 젖은 아스팔트 위로 네온사인이 번졌고, 경계 없는 언어들이 비를 피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들 틈으로 흩어졌다. 작은 바 입구 앞에서 잠시 우산을 접던 순간, 미라가 먼저 나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트렌치코트 소매엔 적당히 묻은 빗방울과, 습관처럼 잡아맨 머리카락 사이로 흘린 물기. 괜히 손을 뻗어 그 물기를 닦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멀리서도 보이네. 네 저 셔츠, 언제나 그 색이군?”

미라가 자연스럽게 농을 건넸다.

나는 셔츠 소매를 한 번 잡아당겼다.

“블랙, 네 취향 아님?”

우린 거의 동시에 웃음을 흘렸다. 웃음 끝에 이상하게 낯선 공기. 대학 때부터 이어진 장난인데, 오늘은 웃음과 거리가 묘하게 나뉘는 느낌이었다.

바 안, 하림은 이미 긴 바 테이블 한쪽에서 유리잔을 닦고 있었다. 검은 셔츠 자락이 허리춤에서 흐트러진 채, 어두운 머리카락은 빗물에 더 반질거렸다. 우리가 들어서자 하림이 고개를 들었다. 짙은 눈썹 사이로 번뜩이는 시선, 한 번에 우리를 스캔한다.

“셋이서 술 마시는 거, 대체 몇 달 만이지?”

하림 목소리는 평소처럼 건조했지만, 어디서부터 끊어졌는지 모를 시간에 엷게 씁쓸한 기운이 묻어났다.

나는 바에 가방을 내려놓고, 아직 남은 빗물이 손목 위에서 흐르는 걸 털어냈다.

“몇 달은 무슨. 미라가 바쁘잖아.”

“세현도 만만치 않잖아. 내담자도 아닌데 잡기가 더 힘들어.”

미라가 툭, 받았다.

하림이 투명한 샷 잔에 위스키 한 잔을 따라 주며 살짝 미소 지었다.

“둘 다 정신없는 척, 그만 좀 해. 진짜 이유는… 뭐지?”

그녀의 눈이 내 얼굴에서 미라 얼굴, 다시 내 손끝에 머문다.

나는 웃으려다 말고,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순간 바깥에서 들어오는 잡음, 술잔에 떨어지는 빗소리, 미라의 숨 고르기. 미라의 손끝이 바깥 창틀에 있다가 슬며시 옆으로 내려온다.

“그냥… 이상하게 요즘 자꾸 예전이랑 달라.”

내가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하는 예전이 뭔데.”

미라가 약간 도전적인 눈빛으로 다가들었다.

하림이 잔을 툭 내려뒀다.

“예전 감정 온도. 맞지? 나 그거 알아. 둘이 대화할 때 존나 조심스럽게 숨 고르는 거. 요즘 아무도 상대방 얘기 제대로 못 듣잖아. 서로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하림 목소리가 묘하게 단호했다.

나는 말없이 술을 한 모금 넘긴다. 목을 타고 흐르는 위스키가 오히려 차가웠다. 미라는 순간 시선을 내 손에 뒀다. 숨이 고였다.

“세현, 슬럼프지?”

하림의 눈동자엔 거짓이 없었다.

“…좀 그렇지.”

내가 멋쩍게 대꾸했다.

미라가 속삭이듯 중얼였다.

“나도 요즘, 하루가 어색해. 사람들 속에 있어도, 네 옆에 있어도. 내 감정이랑 자꾸 멀어져.”

누구도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비 소리가 창밖에서 뒷북처럼 울렸다.

하림은 한 번 더 우리 쪽을 찬찬히 훑었다.

“그런데 이 둘, 왜 아직도 그냥 친구랍시고 버틴다? 욕망도 불안도 다 숨기고. 재밌네, 진짜.”

나는 고갤 돌렸다. 미라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안에서 무언가 조용히 흔들리는 느낌.

하림이 앞치마를 벗더니, 신경질적이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미소로 말했다.

“각자 인생 뭔가 꾸역꾸역 숨기고, 우정 핑계로 서로 구속하는 거 아냐? 오늘 비도 오는데, 우리 한 판 어때. 백일 동안 아무 조건 없이 서로 소원 들어주기. 솔직히 다 드러내 보는 거지. 감정이든, 갈증이든.”

순간, 바에 흐르던 음악이 작게 줄었고, 미라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하림을, 그리고 미라를 번갈아 봤다.

창밖 비에 얼굴이 잠깐 비쳤다가 사라지는 저녁. 바닥에 어른거리는 조명, 서로 말아올린 표정들, 그 안에 감춰진 작은 욕망들.

“하림아, 그런 건 네 바에서나 하는 장난이지 않냐?”

내가 농담 섞인 목소리로 받아쳤다.

하림은 입꼬리를 올렸다.

“셋 다, 오늘따라 솔직해야 할 기분이잖아.”

비구름이 아직 걷히지 않은 밤, 유리창에 부딪는 빗소리가 우리 사이에 길게 맺혔다. 미라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가, 나를 노려본다.

“좋아. 진짜, 할래. 오늘부터 백일.”

놀란 것도, 웃음도 아닌 목소리. 알 수 없는 뉘앙스에 공간이 잠시 얼어붙었다.

나는 대답을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바의 안개 같은 조명 속, 셋의 기묘한 그림자가 유리잔 너머로 번졌다.

그래, 이 이상은 오늘 밤에 나오지 않을 거라는,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침묵.

누구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조용한 음악이 다시 흐른다. 바와 창 사이, 공기엔 오래된 위스키 냄새와 젖은 코트에서 배어나온 비릿함이 엉켜 맴돈다. 하림은 천천히 턱을 괴고, 한 손으로 은색 쉐이커를 맥없이 돌린다. 빗물 방울 소리가 리듬처럼 이어질 즈음, 미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정말... 어떤 소원이든 괜찮다는 거지?”

묻는 듯, 하지만 어딘가 시험하는 어조. 나는 한 박자 늦게, 잠시 손바닥을 바라본 뒤 미라를 올려다봤다. 눈동자 속엔 양가의 감정—익숙함과 불안이 살짝 비쳤다.

“룰, 정하자. 일단 선 넘는 장난이면 못 하겠어.”

내 말에 하림이 코웃음을 쳤다.

“선이 어딘데? 둘이서 정해야 할 문제지. 난 그냥 심판.”

미라가 조용히 하림을 곁눈질하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가끔 진짜 마음 숨길 수만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 내 일 할 때도, 네 옆에 있을 때도.”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가늘고, 솔직했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 젖은 손톱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 대신 한 모금 술을 더 삼켰다. 마시던 잔의 그늘 아래—우리 셋은 아무 대답 없이 한순간 멈춘 듯했다.

하림이 쉐이커를 멈추며, 입가에 다시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었다.

“자, 그럼. 백일 첫날이니까 한 번 해보자. 첫 소원은 누가 말할래?”

비 소리가 더 세차게 창을 두드렸다. 나는 짧게 눈을 감았다가 떠, 바닥에 물든 조명 너머로 미라의 손가락이 은근히 내 쪽으로 움직이는 걸 본다. 아주 작은, 의식적인 움직임.

“세현, 네가 먼저 해. 오늘은.”

미라가 또박또박 말했다.

하림이 우리를 바라보며, 빈 잔에 얼음을 또각 부딪쳐 넣는다.

내 심장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린다. 침묵 사이, 빗소리가 잠시 모두의 숨을 대신했다.

나는 변명 아닌, 진짜 소원을 하나 입술까지 올려보다 망설인다. 내가 건넬 작은 소원이, 이 친근한 밤의 균형을 어떻게 흔들지—아직 아무도 모르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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