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bright Andean Alpaca 18
낡은 스튜디오 안 공기는 오래된 먼지랑 미지근한 물감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기운 없는 형광등 불빛 아래, 캔버스 위 문양의 검은 선이 퍼석하게 번졌다. 내 손가락은 진우가 남겼던 낙서의 곡선을 다시 한번 따라 그려내며 떨렸다. 비가 유리창에 촘촘하게 부딪혔다가 흐르는 소리가 반복된다. 이 겨울 밤, 서울의 거리들은 지워질 듯 희미했다.
저 소리, 어릴 때 진우랑 내내 들었나. 그 녀석이 창밖 보면서 밑도 끝도 없는 얘기 늘어놓던… 남아 있는 목소리가 있다면, 이 소음 속에서 쏟아질 텐데. 나는 멍하니 문양 위를 덧칠하면서 실팔찌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동색이 바래고 실밥이 풀렸다. 한 올만 더 풀어지면, 손목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
벽 한편, 마른 꽃과 흙먼지가 덕지덕지 딸린 유리병 뒤로 진우의 일기장이 기대 있다. 다 쓰다 만 볼펜이 거기 꽂혀 있다. 나는 의자에서 느리게 일어나, 쿵— 하고 책상이 흔들려도 신경 쓰지 않는다. 노트를 열면, 빼곡한 필기가 뒤엉켜 읽기 힘들지만 손에 익은 대로 어느 페이지인지 안다. “망각로(忘却路)”… 진우의 삐뚤한 글씨가 눈에 박힌다.
이상하게도, 그가 사라진 날 밤 내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그 골목—작은 전봇대에 붙은, 아무도 읽지 않을 광고들과 검은색 골목 입구, 진우의 그림체로 다시 그릴수밖에 없다. 내가 미친 건지, 아니면 뭔가 진짜 놓친 건지. 캔버스 옆에 오래된 종이 위로, 똑같은 패턴을 또 따라 그린다. 곡선 안에 묘하게 보인 얼굴—진우 닮은 듯 아닌, 눈동자 없는 실루엣.
“부탁이 있었는데…”
진우가 남긴 유일한 음성메시지가 귓가에서 떠돈다. 하지만 다시 재생하면 뭉개진 잡음만 들린다. 나는 손가락 끝잎으로 실루엣의 눈, 코를 몇 번이고 덧그리다 멈췄다. 어깨가 저려오고, 몸을 쭉 펴려니 창문 밖에 잠깐 누군가 지나가는 그림자가 비친다.
그냥 착각이지. 이 시간에 누가 오겠어. 창밖을 빠르게 다시 확인한다. 모퉁이 편의점 불빛만 젖어 있다.
책상 앞, 내 전화기에 오래 남아 있는 경찰서 번호를 흘깃 바라본다. 오늘도 차기현 경감 목소리, “실종은… 가족이 제일 힘드시죠. 하지만 아직 특별할 건 없습니다.” 짜증만 남았다. 그것 말곤 얻을 게 없으니, 그림에 올인하는 수밖에.
스튜디오 위편 천장엔 누런 얼룩과 석고 조각, 있고 없는 것들이 공존한다. 나는 다시 진우 노트에 손끝을 묻혀, 낙서 옆 빈공간에 새로 문양을 얹는다. 문득, 아래층에 사는 성구 아저씨가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난다. 반쯤 잠긴 문 너머로 삐거덕, 철문 닫히는 소리.
그냥 잡소리겠지. 아니면 또 쓸데 없는 말 한마디 던지러 오는 건지. 진우 어릴 때부터 골목에서 통통 튀던 자전거 소리며, 지금은 어디서도 안 들리는, 그런…"야, 소희야?"
나는 깜짝 놀라 붓을 놓고, 일단 숨을 삼킨다. 문을 꾹 잠근 채 그대로 기다린다. 대답하지 않는다. 침묵.
비 소리가 다시 전부를 덮는다. 내 그림 위로, 캔버스 넘어로, 어디 한구석에서도 진우의 흔적이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이불에 감싸듯 비가 벽을 툭툭 두드린다. 웃돌이 내 어깨에 뭉쳐 있다. 성구 아저씨의 발소리는 더 올라오지 않고 멈춘 것 같지만, 나는 계속 경계하며 손을 주먹 쥔다. 숨소리가 스튜디오 안에만 맴돈다. 책상 위 전등빛이 일기장 어귀에 색을 번지게 하고, 손끝엔 아까 그 실팔찌 올이 계속 신경 쓰인다. 내가 고개를 든 채, 문틀과 창문 사이 명암을 주시한다.
밤이면, 건물 전체가 늘 이렇게 소음과 환영으로 가득하다. 누군가는 내 이름을 부르고, 누군가는 전혀 상관없는 헛소리를 혼잣말처럼 떠들곤 한다. 나는 벽쪽으로 느릿하게 이동해, 창턱을 짚는다. 거기서 어둑한 골목이 반쯤 보이고, 나머지는 얼룩진 빗물만 분주하다.
다시 의자로 돌아와 앉으려다가 몸이 무겁게 휘청인다. 캔버스와 노트 사이, 진우 글씨 위에 덮인 먼지를 가만히 문지른다. 쓸쓸하게 크랙이 나 있는 거울이 내 얼굴을 반쯤만 비춘다—홀쭉하게 꺼진 뺨과 혼란스러운 눈동자. 오래전부터 내 그림 속에도, 진우 일기장에도, 얼굴을 완벽히 그린 적은 없었다. 눈동자만 남겨 두면 자꾸 사라지는 것 같다.
다시—책상 코너에 늘어놓은 오래된 검정 스케치북을 펼친다. 한 장, 두 장, 진우와 같이 그렸던 그 불가사의한 곡선들. 그 안에 늘쭉한 숫자 코드 하나가 새어 나온다. 이 밤에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진우만의 방식으로 연락을 기다린다.
전화기가 그 순간 미미하게 울린다. 액정엔 낯선 번호가 뜬다. 나는 숨을 조여 오며, 왼손으로 천천히 폰을 들어 올린다. 비 소리, 묵직한 정적, 액정 위 하얀 빛.
벽시계 초침이 골 깊게 울린다. 문득, 낯선 번호가 서울 어딘가를 뜻하는 것 같다고 느껴진다. 나는 잠시 손가락을 멈춘다.
종이 위, 붓끝에서 번지는 그 곡선이— 이번만은 나 아닌, 누군가의 메시지로 바뀔 것 같은 불안이 스며든다.

침묵 : 불안한 선
그림이 증거가 된 밤
그림이 증거가 된 밤のストーリーチャッ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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