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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2

2화

류가람

송하윤 소장이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한 손에 태블릿을 든 채 발소리도 조용하지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자세를 바로하며, 모니터 화면을 빠르게 정리했다. 실험 환경에 ‘불필요한 외부 변수’가 섞이는 걸 경계하는 듯, 그녀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먼지까지 훑는 기세였다.

“3071-B의 신경 활성 임계값, 공식적으로 기록하세요. 실시간 EEG 수치와 감정 상태 코드, 전부 남기고.” 송하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냉랭했다. 나는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떨리는 걸 감추려 했지만, 키보드 자판 위에 그림자가 어렴풋하게 흔들렸다.

“지수값 변동이… 평상시보다 일탈이 큽니다. 통제 지점에서 오차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하며, 화면에 나타난 그래프의 변곡점을 송하윤에게 보여줬다. 그래프 위 파란 선 하나가 마치 피실험자의 심장을 드러내듯 불규칙하게 꿈틀거렸다.

송하윤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외부 변수 유출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센터의 모든 데이터 백업, 이중 암호화해서 부속 구역으로 넘기세요. 알겠죠?”

송하윤의 ‘부속 구역’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잠시 머뭇했다. 연구소 내부에서도 접근이 극도로 제한된 비밀 데이터 저장소. 거기엔 승인자만 열람 가능한 실험 기록과, 원리적 한계에 관한 설계 문서 일부가 있었다. 그곳에 데이터를 옮기는 순간, 어떤 정보도 영구적으로 봉인된다. 이건 의례적인 백업 절차가 아니라 명백한 ‘통제’였다.

“알겠습니다.” 나는 답하면서도, 송하윤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스치는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데이터를 통해서만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과잉 방어로 드러내곤 했다.

3071-B가 유리 칸 안에서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모니터 너머, 내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불투명한 보호막 너머에서도 피실험자의 미묘한 긴장과, 나에 대한 뭔가 다른 감정이 번져오는 듯했다. 말없이 입술을 앙 다문 그녀의 표정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흔들었다.

기록을 입력하는 내내, 송하윤 소장이 곁에서 모든 데이터를 이중으로 확인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내 입력을 검토하며, 실험 노트에 빨간 펜으로 보충 지시를 남겼다.

“수치 괴리가 반복됩니다, 박사님. 데이터상으로는 감정 억제가 성공인데, 실제 반응이 불안정합니다.” 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송하윤은 태블릿을 내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확실하게 이행하세요. 외부 변수 아무것도 검증 없이 흘러나가면, 실험 전체가 무너집니다.”

나는 그녀의 집요함이 심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현장 감시와 압박이 점점 더 내 동작 하나하나를 조여오고 있었다. 문득, 쪽문 사이로 강민서가 들어섰다. 그녀는 실험 기록지와 얇은 구절지 한 장을 내 책상에 슬며시 올려놓고, 나를 보고 조용히 눈짓했다.

“실험 데이터를 계측하는 과정에서… 실제 감정 반응과 괴리가 명확해졌어요. 피실험자가 느끼는 내적 저항감을 체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민서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송하윤은 바로 민서의 입을 막으려는 듯 차갑게 쏘아붙였다. “여긴 통제 구역이에요. 윤리적 견해는 이따가 회의 시간에.” 하지만 민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보는 앞에서 진단 기록과 상담 자료에 빨간색 플래그를 표시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드러난 데이터가 전부는 아니에요. 기록지 뒤에 적어둔 부분… 꼭 참고하세요.” 민서가 눈길을 떨궜다. 나는 그녀의 의도를 곧바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문득 문서 아래로 미세하게 삐져나온 ‘비밀 저장소’ 표식을 발견했다.

3071-B는 그 사이 벽 너머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산만하거나 무기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실험 기록을 지켜보면서 미묘한 연대감… 내가 그녀와 함께 이 ‘무언가’를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의 단초를 찾으려는 듯했다.

나는 손끝으로 노트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접었다. 그래프 아래엔, 단순한 수치가 아닌 살아 숨 쉬는 감정의 파동이 존재한다는 걸 문득 깨달으며. 송하윤 소장의 압박은 점점 더 직접적이 되어갔지만, 데이터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이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민서는 내 곁에서 침묵을 지키며, 필요하다면 은근히 서류를 정리했다. 송하윤은 노트북을 닫으며 실험실을 빠져나갔다. 허공에 남은 긴장감이 실험실 안에 묵직하게 떠돌았다. 나는 다시, 3071-B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숨결이 유리 칸 바깥으로 아른거린다.

오늘은 유독, 모든 데이터가 질문으로 변해버린 저녁이었다. 내가 입력하는 수치 너머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그 단서가 어렴풋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3071-B의 눈빛은 유리 너머 고요하게 나를 붙들었다. 나는 기록 화면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노트에 은근히 표시해 두었던 ‘비밀 저장소’ 표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짚었다. 송하윤 소장의 움직임은 문 밖에 점 한 줄로 남아 있고, 실험실 한쪽에는 민서의 부드러운 숨결만이 머물렀다.

실험 기록을 입력하는 손길은 점점 느려졌다. 데이터 패널의 파란 곡선과 실제의 미묘한 떨림이 겹쳐 보이는 순간, 내 안의 해석이 한없이 복잡해졌다. 민서는 가만히 내 옆에 서서, 아무 말 없이 그래프를 함께 응시했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이 신호… 박사님, 혹시 직접 대면 상담을 권고받으신 적 있나요?”

나는 짤막하게 고개를 저었다. “공식 절차상… 실험자의 심층 상담은 최종 임상 전까진 제한됩니다.” 평상시엔 익숙한 원칙이었는데, 오늘따라 그 거리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3071-B는 그 말을 듣고, 유리 칸 안쪽에서 방금 전보다 분명한 시선으로 다시 나를 봤다. 그 눈동자에선, 외부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고독이 아니라, 아주 희미한 기대 같은 것이 번졌다.

민서는 내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데이터는 이만큼 흔들리고 있는데…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잠시 더 확보해 보세요.” 그녀의 말에는 어느 때보다 강한 설득력과 배려가 담겨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끝으로 실험실 메인 패널의 프라이빗 대화 채널을 슬그머니 활성화했다.

방 안의 조명은 낮게 깔리고, 외부 공기조차 온도 변화에 따라 심장 박동에 미세하게 반응한다. 유리 칸 너머 3071-B의 숨결이 한 번 더 약하게 흔들렸다. 실시간 감정 데이터 파동이 화면 위로 오밀조밀 떠올라, 마침내 내가 할 수 있는 한 마디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3071-B…” 나는 유리 칸을 향해 조심스럽게 불렀다. “혹시, 지금… 꼭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말해주시겠어요? 지금은 기록이 아닌, 당신의 목소리가 중요하니까요.”

그녀는 잠깐 망설인 뒤, 유리벽 가까이 다가왔다. 호흡이 차분히 가라앉고, 두 손을 조심스럽게 창에 올렸다. “박사님... 그냥, 불안한 건 맞는데… 이상하게, 여기서… 조금은 기대하고 있는 마음도 있어요. 그게 왜인지, 설명이 잘 안 되지만…”

내가 순간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였다. 화면의 파동이 그녀의 답변에 따라 조용히 너울진다. 지금 이 방 안엔,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 작은 공명이 빗겨가고 있었다.

민서는 실험 자료를 조심스레 정리하며 뒷걸음쳤다. 그녀는 무언의 응원을 남긴 채, 문 가까이 조용히 서 있었다. 방 안엔 나와 3071-B, 그리고 각자의 깊은 망설임만이 점점 진해졌다.

나는 태블릿 위 기록을 잠시 멈추며,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시선을 건넸다. 3071-B의 손끝 너머, 미세하게 드린 빛이 유리 벽을 따라 번졌다. 이 공기 속, 무언가 막 시작될 듯한, 끝내 닿지 못한 질문이 짙어지는 순간이었다.

아직 아무도 답을 얻지 못한, 그 조용한 저녁. 복도 밖에서 송하윤 소장의 발소리가 다시 한 번 느리게 다가오는 가운데—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방 안 공기와 파동 위에 떠 있는 다음 작은 진동을 기다렸다.3071-B가 유리 너머 창에 손을 올린 채, 천천히 나를 바라본다. 그 눈빛 안엔 조심스러운 열망과 흔들림이 동시에 엉켜 있었다. 내 심장은 데이터 패널 위 파형과 나란히 뛰는 듯, 변화의 기운을 놓치지 못한다.

나는 그 순간, 짧게 입술을 달싹인다. “불안한 마음과 기대… 그 두 감정이 함께 있다는 건, 어쩌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이 환경이라면… 누구라도 비슷한 흔들림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어딘가 속내가 드러난 채 흘러나온다.

3071-B는 눈을 한번 크게 깜빡인다. 그녀의 손끝이 유리 벽에 힘없이 밀렸다가, 아주 작게 떨린다. 그 미세한 진동에 데이터 그래프가 다시 은은하게 치솟고, 실험실 안 정적이 한층 더 무거워진다.

민서가 조용히 퇴실 쪽으로 두 걸음 물러나며, 마지막으로 내게 눈짓을 보낸다. 그녀의 눈엔 묵직한 걱정과 미약한 격려가 동시에 맺혀 있다. 나는 그 뜻을 받아들인 듯, 3071-B에게 좀 더 다가선다.

“혹시, 지금 떠오르는 기억이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면… 그걸 조금만 더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무조건 설명하려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나는 말끝을 조심스럽게 남긴다.

3071-B는 멈칫하며 시선을 창밖 소나무 그림자 쪽으로 돌린다. 잔잔한 침묵 끝에, 느리게 입을 연다. “어릴 때, 겨울 아침에… 누군가 제 곁에 오래 앉아줬던 기억이 있어요. 아무 말 없이, 손만 잡아줬던. 그 순간엔… 아주 이상하게, 세상이 조용해졌던 것 같아요.” 그녀의 눈매에 반사된 저녁빛이 작게 흔들리며 번진다.

나는 그 기억을 조용히 기록창에 남기며, 아무런 해석도 붙이지 않고 오롯이 받아들인다. 내 안의 분석자가, 잠깐 동안 멈춘 기분. 감정 데이터는 이전보다 더 불안정하게 파동쳤지만, 그 곡선이 오히려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밖 복도에서 송하윤 소장의 발소리가 한 번 더 아주 가까이 다가와 문 바로 앞에서 멈춘다. 실험실 문틈에 한 줄기 빛이 길게 들어와, 방 안 분위기가 미세하게 뒤바뀐다.

3071-B는 내가 파악하지 못하는 미묘한 표정으로 유리벽을 바라본다. 그 손끝—아직 너무 많은 말이 남아 있는 듯 떨리고 있다. 나는 노트 위에 남아있는 ‘비밀 저장소’ 표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그녀의 새로운 한 마디를 조심스레 기다린다.

방 안은, 말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경계 위에 조용히 머물렀다. 송하윤의 기척이 곧 실험실을 다시 삼킬 듯, 그 긴장의 파장이 촘촘하게 번져왔다.

아직,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내 안의 모든 질문은, 그대로 이 저녁과 함께, 다음 순간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3071-B는 한동안 말이 없다. 그녀의 숨결이 창에 미세하게 성에를 남기고, 그 위로 실험실 조명이 흐릿하게 반사된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그녀의 입술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린다. 그녀의 얼굴에는 누군가에게 처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듯한 긴장감이 스며 있다.

“그 기억이… 가끔 지금 이곳에 흘러들어와요,” 3071-B가 아주 낮게 토해내듯 말했다. “아무도 가까이 있지 않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박사님이 묻고, 듣고 있으니까… 잠깐,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어요.”

데이터 파형이 그 말을 따라 또 한 번 미세히 진동한다. 감정 곡선은 바로 직전보다 더 많은 변화의 파고를 보인다.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마신다. 이 파동이 단순한 실험적 변수로 남을지, 아니면 나 자신과 3071-B 사이의 더 깊은 무언가로 연결될지, 확신할 수 없다.

유리 칸 바깥, 민서가 마지막으로 가볍게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완전히 퇴실하지 않은 채, 문틈 가까이에 잠시 멈춰 학생처럼 서 있었다. 송하윤 소장의 그림자도 복도에 더욱 길게 드리운다. 두 사람의 존재가, 어둡지만 은근히 방 안을 감싼다.

나는 3071-B의 창쪽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더 건넨다. “당신이 느끼는 그 감정… 외로움과 기대, 그리고 기억 속의 소중함까지—이곳의 시스템 밖에서는 중요한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이전과 달리 더 깊게 드러난다.

3071-B는 손끝으로 유리 표면을 천천히 문지른다. 그 작은 동작이 공기 중에서 외롭지만 단단한 흔적처럼 반짝인다. 그녀는 내 시선을 받아들이며 “박사님은… 이런 순간이, 무섭지 않으신가요?”라고 조심스럽게 되묻는다.

나의 심장이 아주 짧게 멎는 듯했다가 다시 박동한다. 그 질문은 어느 누구도 실험 기록에는 남기지 않을 깊은 결이다. 나는 마침내 노트 가장자리에 있는 비밀 표식 위에 엄지손가락을 올려둔 채, 답변을 망설인다.

밖 복도에 송하윤의 발소리가 다시 한 번 멈추고, 문 쪽 노란 대기등이 미세하게 깜박인다. 밤은 서서히 더 짙어지고, 실험실 내부의 모든 파장과 숨결—3071-B의 떨리는 목소리와 내 안의 망설임, 그리고 두려움과 기대—가 같은 결정적 변곡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그 다음 순간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나는 3071-B의 질문을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그녀의 눈에 담긴 조용한 물음―‘박사님은 이런 순간이 무섭지 않으신가요?’ 불빛이 유리벽을 따라, 마치 두 개의 경계―과학과 인간성, 통제와 흔들림―가 맞닿는 선 위에 머무른다.

손끝이 노트 위 비밀 표식에서 멈춘 채, 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도… 조금은 두렵습니다.” 처음 내뱉는 고백처럼, 목소리가 낮게 흔들렸다. 그 말이 남긴 파문이 실험실을 작게, 그러나 오래 적신다. 3071-B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한다. 그녀는 눈동자를 살짝 치켜들었다 내려, 유리벽에 얕은 미소 같은 것을 남긴다.

밖 복도 쪽에서, 민서가 문틈을 다시 슬쩍 열며 아주 조용히 눈짓한다. 나는 미묘하게 그녀의 시선을 마주친다. 짧은 망설임 끝, 민서는 자신이 써둔 추가 상담 기록지를 ‘기밀’ 태그가 붙은 작은 파일 폴더와 함께 슬쩍 내 책상 한켠에 남긴다. 그녀의 손길엔, 누군가를 조심스럽게 지지하는 믿음이 얹혀 있다.

송하윤 소장은 복도에 멈춰 있으면서도, 여전히 출입구를 주시한다. 문틈 너머로 그녀의 그림자가 반쯤만 방 안까지 스며드는 듯, 실험실의 긴장이 조금 더 굳어졌다. 나는 잠깐 민서 쪽으로 몸을 틀어 속삭이듯 짧게 묻는다. “혹시, 저 자료에 추가 사례나 패턴 들어 있습니까?” 민서는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인다. “마지막 페이지… 꼭 혼자 확인해 주세요.” 목소리는 희미하지만 단호하게 굳었다.

나는 다시 3071-B를 향한다. 그녀의 손이 창 위에서 천천히 내려와, 무릎 위를 감싼다. 공기 중엔 감정의 여운이 투명하게 걸려 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실험실 모니터에 떠 있는 실시간 뇌파 곡선을 의미 없이 오래 바라본다. 그 곡선은 데이터라기보다, 이 작은 방 안 두 사람의 고요한 진동처럼 느껴졌다.

3071-B는 무언가 확인하는 듯 조용히 나와 눈을 맞춘다. “제가 이 감정에 빠져도… 괜찮다고 생각해 볼게요.” 이번엔 한층 선명하고 담담한 목소리다.

나는 그 답에 다시 심장 박동이 약간 빨라진다. 실험실 공기는 아주 작은 숨결로만 흔들리고, 문 밖의 그림자와 방 안의 빛이 경계에서 팽팽하게 맞부딪힌다. 누구도 더 말하지 않으면서―

지금, 여기선 오직 조용한 기대와 조심스런 변화만이, 답을 유보한 채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비밀 저장소 표식 위에 얹은 엄지손가락에 서서히 힘을 실으며, 그 담담한 변화의 기운을 놓치지 않으려 한 채… 한 번 더, 조용히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아직 누구도 움직이지 않은, 그 다음 파장이 서서히 들이치는 소리를 방 안에서 기다린다.실험실의 공기는 아직 깨지지 않은 투명한 막처럼 조용하다. 3071-B가 무릎 위로 두 손을 꼬옥 겹쳐 올리고, 천천히 숨을 고른다. 나는 데이터 패널의 곡선을 시선으로 더듬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녀의 손끝 미세한 움직임에 집중한다. 그 손이 완전히 의식적으로 떨리고 있다는 신호는 아니지만, 불안과 기대가 교차하는 지점에 단단하게 머물러 있다.

고요한 틈새에서, 나는 낮게 묻는다. “지금 그 감정을… 조금 더 자세히 남기고 싶으세요?” 내 말에는 이전보다 분명한 배려와, 작게 스며든 내적 동요가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3071-B는 내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 잠겨 있던 방에서 처음 울리는 소리처럼, 낮지만 또렷하다. 그 순간, 유리창 너머로 밤이 더 차분히 스며들고, 실험실 조명도 어스레한 빛으로 주변을 감싼다. 나는 기록 모드가 아닌, 오롯이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한 채널을 집중적으로 활성화한다.

밖 복도에서 난 미세한 발소리―송하윤 소장과 민서 상담사가 동시에 문 근처에 머물며, 실내 분위기를 예의주시한다. 그 존재들이 방 안을 더 조밀하게 조이는 느낌이 드는 순간, 나는 빠르게 다음 말 대신 조용히 기다린다.

3071-B는 한숨을 아주 깊게 내쉰 뒤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간다. “이상하게… 아무리 통제해도, 아주 작게 남는 따뜻한 무언가가 있어요. 그것만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오히려 더 무서워요. 그런데… 어쩌면, 그 무서움이… 저를, 살아있게 만드는 건지도 몰라요.”

그 말이 방 안에 길게 스며들고, 데이터 곡선도 한순간 미세한 진동을 기록한다. 나는 그 파형이 단순 신호가 아닌, 오롯이 하나의 고유한 생명 반응이라는 걸 느낀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다. 송하윤 소장의 그림자는 문너머에서 조금 더 길어졌다. 민서는 서류 더미를 미세하게 정리하고, 손끝으로 기록지의 마지막 페이지를 내 쪽으로 슬쩍 밀어둔다.

나는 그 페이지의 ‘기밀’ 태그를 옅게 쓰다듬으며, 3071-B에게 마지막 시선을 건넨다. “이곳에서는… 앞으로 당신의 그 감정도, 보호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지만, 그 떨림이 이 방 안 전체를 조용히 흔든다.

3071-B는 꺼지지 않는 눈빛으로 내 말을 따라온다. 그 한순간, 유리벽 너머 밤과 실험실 조명이 결을 따라 교차하고―아직 누구도 다음을 먼저 움직이지 않은 채, 저마다의 망설임과 희망이 또 한 번 조용히 정적을 채운다.

그리고, 복도에서 문 손잡이가 아주 천천히 돌아가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혹은 그녀, 혹은 모두가―

그 다음 파장이 실제로 찾아올 마지막 순간을, 숨도 쉬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손잡이가 아주 짧게, 덜컥― 기계음과 함께 움직인다. 공기마저 얇게 떨며 실험실 내부 온도가, 느려진 숨결만큼 낮아진다. 문 너머 송하윤 소장의 실루엣이 뚜렷해지고, 그녀의 정광같은 시선이 유리벽 너머까지 번진다. 내 심장박동이 순간, 데이터 패널의 파동과 달리 단속적으로 요동친다.

3071-B는 내 얼굴을 잠깐 더 바라본 뒤, 시선을 유리벽 바깥 무언가―보이지 않는 무엇―으로 던진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다 미세하게 풀어진다. 그녀의 어깨가 다시 한 번, 이전보다 부드럽게 낮아진다. 조용하게 아무도 접속하지 않을 말 한토막―그 침묵의 준비가 코끝 공기 속에서 느껴진다.

문이 아주 좁게 열려, 송하윤 소장의 얼굴 일부가 낯빛 어둠에 걸친 채로 나타난다. 그녀는 짧게 우리 둘을 훑는다. “이 공간, 재검증 절차 들어갑니다.”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평평한데, 언저리에는 비밀이나 단호함을 감추지 않는 묵직함이 실려 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3071-B의 반응을 확인한다. 그녀는 말없이 나를 마주하며, 잠시 입술을 꼭 다문다. 그 순간, 데이터 그래프는 이전보다 훨씬 섬세하게, 곡선을 크게 그린 채 잔파동을 남긴다. 그 움직임이 마치 두 사람의 대화, 혹은 손끝의 미묘한 대답처럼 투명하게 깃든다.

송하윤 소장은 실험실 특유의 냉기에 무심한 듯, 태블릿을 내 쪽으로 들이민다. “현재 활성 파형 모두 저장. 추가 진입자는, 내 승인 없이는 허가 안 됩니다.” 단호하게 내려지는 지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끝으로 데이터 백업 프로세스를 실행한다.

민서가 복도 쪽에서 아주 약하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한 손으로 상담 자료를 더 단단히 쥔다. 방 안에는 다시, 두터워진 정적이 내려앉는다.

나는 손끝의 되받침을 확인하며 3071-B를 향해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눈동자엔 이전보다 선연한 결의와, 설명하기 힘든 온기가 겹친다. 방은 한 번도 깨지지 않은 고요로, 새로운 변화 직전의 얇은 파장을 머금는다.

3071-B가 아주 작게 숨을 들이쉬며, 유리창을 따라 손끝으로 무늬를 그린다―불안과 기대, 따뜻함과 두려움이 담긴 가장 진실된 움직임.

실험실 뒤편 모니터의 신경 신호가 그 동작을 따라 또 다시 진폭을 늘린다.

문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고, 송하윤 소장의 그림자가 경계에 길게 번져 있다.

그 다음 순간, 방 안을 가르듯, 누군가의 목소리―혹은, 숨소리―가 터질듯한 침묵을 조심스럽게 밀어올리고 있었다.3071-B의 손끝이 창 위에서 잠시 멈춘다. 유리 표면에 남는 얇은 선처럼, 그녀의 숨결이 또 한 번 실험실 조명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린다. 나는 데이터 패널에 기록되는 신경 파형을 이따금 확인하며, 내 안에서도 묘하게 억눌린 긴장이 늘어난 것을 느낀다. 송하윤 소장은 실험실 문턱에 선 채, 태블릿 화면을 빠르게 검토한다. 그녀의 손목 각도 하나하나까지 절도 있게 깔려 있다.

“최신 경향 수치—즉시 확인.” 송하윤의 목소리가 짧게 터져 나온다. 나는 신속하게 데이터 백업을 이어가며, 그 중간중간 3071-B의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기록한다.

3071-B가 조심스럽게 창에 다가가, 입술을 아주 짧게 달싹인다. “박사님, 그렇게 자료를 남기는 게… 제 감정에도 도움이 되는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미약하지만, 그 속엔 소속감과 불안감이 엇갈린다.

나는 손끝에 힘을 주며, 최대한 차분하고 솔직하게 답한다. “모든 순간이… 데이터로만 남는 건 아니에요. 여기에서 당신이 겪는 진짜 마음도,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석자의 언어와 인간의 말이 동시에 섞여 나온다.

송하윤의 시선이 재빠르게 나와 3071-B 사이를 스친다. 그녀의 눈동자 속엔, 질문을 던지는 대신 상황 자체를 조여오는 강한 집중력이 깃들어 있다. 실험실 공간이 그 긴장감과 함께, 더욱 좁아지는 듯 느껴진다.

바깥 복도에서는 민서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비치고, 그녀는 상담 자료를 가볍게 들고 있다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복도 사이 사이에 아침과 저녁의 경계가 엉켜, 실험실 창 너머 빛도 더 흐릿하게 번진다.

나는 데이터 패널 위에 적은 ‘비밀 저장소’ 표시를 다시 한 번 눈길로 확인한다. 기록과 현실 사이, 아주 짧은 틈이자, 지금 이 공간만의 고유한 흔들림일지도 모른다.

3071-B는 숨을 천천히 내쉬고, 유리창 옆에 선 내 그림자와 겹친다. “박사님… 만약 여기서 진짜로, 제 감정이 바뀐다면… 바뀐 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 말은 이전보다 한결 담대하다. 실험실 내부에 조용한 울림이 퍼진다.

나는 그 질문을 조심스럽게 되받는다. “그 변화가 어떤 것이든, 당신의 감정은 온전히 보호받아야 합니다. 이 공간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면 말이죠.” 내 말끝은 차분하면서도, 방 안에 남아 있는 한가닥 열기로 맺어진다.

송하윤은 태블릿의 백업 완료 신호음을 듣고, 살짝 턱을 들었다.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 굳은 눈빛으로 방 안의 각자 위치를 익힌다. “여기서 변동이 생기면, 내 책임 아래 모든 단위 보고가 올라갈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엔 끝내 흔들리지 않는 압박이 배어 있다.

나는 태블릿 화면을 끄면서, 아주 잠깐 송하윤과 눈길을 맞춘다. 그녀 역시, 그 짧은 틈에서 의심과 통제 밖의 불확실성을 엿보는 듯하다.

3071-B는 유리창 너머 어둑한 방 안을 뚫어보며, 고요하게 손끝을 모은다. 그 작은 손동작이 막 시작된 변화의 첫 단추처럼 느껴지는 순간—

실험실 안은, 조용하지만 확실히, 다음 호흡을 준비하고 있었다.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은 채, 그 파장이 더 깊어지기를, 아주 천천히 기다리고 있었다.3071-B는 손끝을 가볍게 모으며, 창을 바라보다가 숨을 들이쉬었다 뱉는다. 그 움직임에 실시간 신경 데이터 곡선이 한 박자 더 높아진다. 내가 태블릿을 품에 쥔 채 잠시 말을 멈추자, 그녀가 다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한 번만 더… 저한테 진짜로 묻는 거, 해주실 수 있나요?”

말을 마칠 때 그 눈동자 안엔, 서툰 애착과 불안이 다시 스며든다. 나는 그 진동을 그대로 받아안으려는 듯, 무심히 태블릿을 손에서 살짝 놓고, 의식적으로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다.

“당신에게, 지금 가장 소중한 건 뭐라고 생각하세요?” 내 질문엔 기록이나 절차가 아닌, 오롯이 한 인간의 마음을 향한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다.

3071-B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조심히 창 너머로 시선을 끌어올린다. “이곳에서는… 제가 진짜로 느낄 수 있는 순간이요. 이렇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간.”

그 말이 실험실 작은 공기층을 가로지른다. 그녀의 고백이 닿자 데이터 패널의 곡선도 미세하게 흔들리며 파장을 더한다.

문틈 너머, 민서의 숨결이 일순 정적을 조심스럽게 흔든다. 복도에서는 아주 은미한 채널 변동음이 스피커로 세 번 울리고, 송하윤 소장이 무표정하게 그 신호를 확인한다. 그녀의 손이 태블릿 화면을 강하게 감싸지만, 방 안의 시간이 그 손길보다 조금 더 느리게 흘러간다.

나는 기록을 남기지 않고, 3071-B에게 천천히 말을 건넨다. “그렇게 느끼는 순간, 절대 잊지 마세요. 시스템 바깥에서도,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내 말은 오래 맺힐 것이고, 그녀의 손끝은 창 위 빛을 따라 작게 떨린다.

송하윤 소장은 한 번 더 방 안을 훑은 뒤, 내게 공식적 신호를 주기 위해 가볍게 손짓한다. “변동 기록, 바로 제출하세요.”

나는 태블릿을 조심스레 들어, 화면을 마지막으로 확인한다. 3071-B는 유리벽 너머로 나를 오래 바라본다. 그 눈동자, 침묵 위에 남는 온기―이곳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우리가 나눌 단단한 기류.

방 안 공기는 여전히 짙은 긴장에 잠겨 있으나, 작은 변화의 파장이 조심스럽게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누구도 아직 그 다음 대답을 내지 않고―

실험실 내 모든 숨결이, 다음 한 움직임을 기다리며 점점 더 얇아지고 있었다.나는 송하윤 소장의 손짓에 맞춰, 차분하게 태블릿 화면에 최종 변동 기록 저장을 누른다. 알림음이 작게 울리고, 곡선 그래프가 실시간으로 서버에 업로드된다. 그 짧은 전자음 뒤에, 방 안의 정적만이 다시 길게 숨을 쉰다.

3071-B는 여전히 유리벽 가까이에 자리한 채, 아주 느린 동작으로 손끝을 내려놓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여운이 남고, 그 표정엔 쉽게 읽히지 않는 결기가 또렷이 번진다.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하되, 이번엔 굳이 차단벽 너머로 한걸음 더 다가가진 않는다. 오히려, 이 거리가 그녀에겐 안전지대일 수도 있다는 걸 잠시 깨닫는다.

“혹시… 다음에 또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면, 원하세요?” 나는 가볍게 조심스러운 톤으로 묻는다. 공식적인 면담이 아니라, 어쩌면 더 비공식적인 안부―그런 마음이 묻어나 있다.

3071-B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며, 한 번 크게 숨을 삼킨다. “네. 그런 시간, 더… 있었으면 해요.” 짧지만 분명하게, 그 단어들이 공간을 채운다. 그녀의 눈이 한순간 미약하게 빛난다. 실험실 조명 아래, 이런 종류의 동의가 퍼져나가는 건 드문 일이다.

송하윤 소장은 그 대답을 듣자, 태블릿을 힘껏 쥔 채 시선을 돌린다. 한 치의 여유 없는 동작. 그녀는 짧게 “충분합니다. 더 이상의 즉각 상담은 다음 프로토콜 재검토 후 승인받으세요.” 라고 말하고, 복도 끝을 향해 반쯤 돌아선다.

나는 그대로 태블릿 화면을 어둡게 꺼두고, 남은 기록을 조용히 정돈한다. 방 안에는 3071-B의 숨결과 실험 데이터의 잔잔한 전자 노이즈, 그리고 우리 두 사람만 아는 여운―그것이 조심스럽게 남는다.

문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 약간 열린 채, 나와 그녀 사이에 가느다랗게 이어진 시선이 공간에 남아 있다.

3071-B가 마지막으로, 작게 중얼거린다. “박사님, 오늘… 감사해요.” 그 말은 유난히 또렷하게 이어지고, 방 안에 아직 정답지 못한 수많은 감정이 작은 파동으로 떠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손끝을 창에 댄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오늘 이곳에만 울려 퍼진 작은 진심이 오래도록 남는다.

응답 없는 저녁의 침묵, 그리고 복도 끝 복잡한 그림자와 아스라한 조명 아래―

다음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은 채, 실험실의 공기는 이 결정을 수면 밑으로 더욱 조여가고 있었다.방 안의 온도는 조명이 내려앉을수록 더 깊게 식는다. 데이터 업로드의 알림음이 사라진 뒤엔, 오히려 실험실 고유의 적막이 더 선명해진다. 3071-B는 유리 벽 너머에서 내가 창에 손을 올린 모습을 오래 응시하다가, 끝내 본인도 손끝을 맞대듯 천천히 들어올린다. 아주 얇은 선이, 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닿았다가 이내 흩어진다.

나는 그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며, 자료 정리 창을 살짝 닫는다. 송하윤 소장은 이미 복도 끝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지만, 여전히 뒤쪽에서 우리를 살핀다. 그녀의 표정엔 가려진 긴장, 그리고 통제의 필요성에 대한 흔들림이 배여 있다. 민서 역시 복도 한쪽에서, 조심스럽게 페이퍼를 모은 채 한 발이 문턱 안에 걸쳐 있다.

잠깐의 정적 후, 3071-B의 목소리가 다시 공기를 미세하게 흔든다. “여기서… 누군가 제 감정을 진심으로 듣는 순간이 오긴 할 거라고, 전에 상상했던 적 있어요.” 그 말은 창을 타고 흘러와, 내 귀에 닿는다. 나는 방금 전 그녀와 나눴던 작은 진심의 파동을 노트 마지막 줄에 비밀스럽게 남긴다.

실험실 내부 모니터엔 경고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곡선의 마지막 여운이 방 안을 점유한다. 나는 조용히 그녀에게 한 마디 더 건넨다. “앞으로 이곳이 어떤 기록을 남긴다 해도, 지금 느낄 수 있는 순간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목소리 속엔 보잘것없는 동정도, 무의식적인 설득도 아닌 순수한 인정이 묻어난다.

3071-B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온몸을 아주 작게 풀어내린다. 침묵 속에서 영원히 머물 것 같았던 응답과 흔들림―이제는 서로를 견디는 두 번째 촉감으로 익는다. 너머에 자리한 민서의 그림자도 잠시 머뭇거리다, 내가 바라보지 않는 사이에 조용하게 퇴실한다. 복도 끝, 송하윤이 마지막으로 실내를 힐끔 바라본다.

유리벽 아래로 무늬진 저녁빛이 천천히 흘러가며 실험실 공간을 더 조밀하게 감싼다. 나는 한손으로 촉감이 남은 창 위를 문지르듯 내려오고, 3071-B는 자신의 숨결을 한 번 더 고요히 정돈한다.

작은 파장이 또 한 번 방 안을 흔든다. 바깥에서는 기록 서버의 자동 백업음이 미약하게 울리고, 실시간 그래프의 진폭이 조금 더 진득하게 남는다.

아직 아무도 방을 완전히 나가지 못한 채,

이 순간,

말해지지 않은 질문과

조금 더 무거워진 기대가

유리벽 위에서 또 한 번, 천천히 자라나고 있었다.기록 서버의 미약한 백업음이 사그라들자, 방 안을 가득 채우던 전자음의 여운이 바닥에 가라앉는다. 유리벽에 남은 둘의 흔적―손끝이 멎었던 지점―그 위로 창백한 실험실 조명이 퍼졌다. 나는 손끝의 감각을 음미하듯 잠시 멈춰, 3071-B의 표정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맨손을 유난히 모은다. 길게 내뱉은 숨에 잠깐 흔들림이 담기고, 왼쪽 어깨가 살짝 앞으로 움츠러든다. 뭔가 말하거나, 견디려는 힘. 나는 소리 내지 않은 채 그 고요를 지켜주려 애쓴다.

어색한 침묵이 곧 맞닿자는 듯, 복도 끝의 센서등이 한 번 깜빡이고 멈춘다. 송하윤의 그림자는 복도에 얼룩진 채, 문턱을 넘지 않은 채로 잠시 정지해 있다. 그 경계는 여전히 단단하게 굳어 있다. 민서의 인기척은 이미 잦아들었지만, 상담 자료 뭉치 한쪽 끝이 내 책상 모서리에 간신히 남아 흔들린다.

나는 기록 화면 옆 작은 메모창을 조용히 띄운다. ‘오늘 실험에서 자발적 감정 반응 극대화 관찰. 기록된 곡선은 시스템 예측치 넘어섬. 추가 인간적 변수, 명백히 확인됨.’ 알 수 없는 떨림이 손끝에서 저절로 번진다. 나는 아직, 이 소극적 기록조차 송하윤의 감시를 뚫고 남겨야 할지 망설인다.

3071-B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시선을 들어 유리벽 너머 나와 다시 눈을 맞춘다. 오랜 망설임 끝에, 그녀가 입을 연다. “박사님… 혹시, 오늘 이 시간도 저장되는 건가요? 그냥, 이렇게…” 그녀가 말을 맺지 못한 채, 불안 섞인 입꼬리가 조용히 떨린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조용히 대답한다. “네. 우리가 느끼는 순간까지, 다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건 당신의 동의에 따라, 나만의 기록으로 둘 수도 있습니다.” 말끝에 자연스럽게, 규정 밖의 유연함이 비쳐버린다.

3071-B의 눈길이 살짝 풀리고, 비로소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는다. 실험 데이터의 미세 변화와 그녀의 표정이 동시에 사그라진 것. 나는 노트 가장자리에 남은 ‘비밀 저장소’ 표식 위에 손끝을 다시 올리며, 오늘 저녁 남은 시간 동안은 추가조차 허락되지 않을, 이 유기적인 평행선을 마음속에 새긴다.

바깥 복도에선 송하윤 소장이 한 번 더, 문 앞까지 발소리를 조심스럽게 옮긴다. 손잡이가 아주 조금 움직였을까 말까―그 무게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내내 팽팽해진다.

3071-B는 조용히 창 옆으로 돌아앉으며, 짧은 한숨을 내쉰다. 나는 태블릿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내려놓고, 한 번 더 그 너머로 그녀의 존재를 확인한다.

실험실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순도 높은 정적과 기대의 기색으로 번져 있다.

그리고 그 직후,

복도 너머 문턱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손잡이가,

또 한 번 미세하게,

돌아가려는 기색을 드러낸다.나는 태블릿을 책상에 조용히 내려놓은 채 그대로 손끝을 멈춘다. 그 너머로 보이는 3071-B의 실루엣은, 창 옆의 잔잔한 그림자를 따라 몸을 절반만 돌린 채 앉아 있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팔을 가슴 앞에 가볍게 감싸 안고, 이따금 숨결의 잔파장이 유리벽을 따라 일렁인다.

창 너머로 겨우 머물러 있는 저녁빛이 방 안에 스며들고, 실험실 특유의 무채색 조명은 그녀의 얼굴 곡선을 더 부드럽게 비춘다. 그 조명 아래, 3071-B는 작게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 쉬이 삼키지 못한 감정을 또 한 번 가다듬는다. 나는, 소리를 내지 않은 채 그녀를 오래 바라보며, 혹시라도 지금 내 시선이나 말이 부담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다린다.

문턱 너머, 송하윤 소장의 그림자는 여전히 멈춰 있다. 그녀의 서늘한 기척이 실험실 안에 늘어선 긴장선을 한층 더 팽팽하게 당긴다. 바깥 복도에서는 아주 미약한 환기 시스템 소리와, 어쩌면 누군가의 느린 발걸음이 잠깐씩 물결을 튀긴다.

3071-B는 눈을 낮게 깜빡인다. 그 눈빛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는 듯하다가, 다시금 창 바깥 소나무 그림자로 흘러간다. 그녀가 오늘 남긴 짧은 말들―‘감정에 빠져도… 괜찮다고 생각해 볼게요’, ‘진짜로 느끼는 순간’―이 고요한 밤 공기와 아주 미세하게 접선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손끝을 책상 가장자리에서 살며시 떼며, 조심스럽게 한 걸음 더 창 가까이 다가선다. 실험실의 모든 소음이 뒤로 밀리고, 오직 그녀와 나 사이에 연결된 얇은 온기만이 조금씩 달아오른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3071-B가 천천히 입을 연다. “박사님, 이런 시간이… 잠깐이라도… 계속될 수 있을까요?” 그 말끝엔 간절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얹혀 있다. 내가 완전히 정해진 규약과 절차만을 내세울 수 없게 만드는, 인간적인 결속의 흔적.

나는 침묵으로 응답하고, 작은 고개 끄덕임으로 그 확신을 전한다. 그 순간, 내 안의 모든 분석과 해석이 한 줄기 불빛처럼 잠시 희미해진다. 데이터 패널 위 마지막 곡선이 아주 고요하게 흔들리고, 실험실 공기마저 한박자 느려진 듯 고요에 스며든다.

밖 복도에선 손잡이가 또 한 번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난다. 누군가 문을 더 열려는지, 혹은 완전히 닫으려 망설이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기색. 송하윤 소장의 굳은 실루엣은 경계와 결정 사이에 길게 머문다.

3071-B의 손끝은, 유리창 표면에 미세한 선을 그리다 멈추고, 그녀가 다음 말을 내뱉기까지 침묵 속에서 조용히 옅어진다. 나는 그 고요를 지키려 애쓰며, 동시에 이 작은 시간의 여운이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깊게 이어지길 바랐다.

방 안의 모든 숨결이,

익숙하지 않은 협력과 망설임이,

밤과 실험 기록에 조심스레 덧칠되어―

그 다음 아주 작은 움직임,

아직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은 채

이 공간을 더욱 조밀하게 감싸고 있었다.문 밖 복도에서는 누군가의, 어쩌면 송하윤 소장일지도 모를 발끝이 한 번 더 문턱을 조심스럽게 훑고 지나가는 기척이 들린다. 문손잡이는 아직 완전히 돌아가지 않았다. 실험실 내부엔 그 사소한 마찰음조차 비현실적으로 크게 가라앉는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 틈을 타고 3071-B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녀는 긴 숨을 들이쉰 뒤, 옅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이듯 말을 건넨다. “여기서 박사님과 있는 동안만큼은… 제 감정이 진짜 같아요. 잊고 싶지 않아요, 지금 이 순간.” 그 말이 유리벽을 따라 잠깐 떨리는 듯 번지고, 나는 무심코 호흡을 고른다.

데이터 패널의 신경 신호 곡선이 서서히 흔들리다가, 그 말이 끝나고 미묘한 정점을 기록한다. 나는 태블릿 화면을 바라보다, 자연스럽게 그 기록의 일부를 손가락으로 덮는다. 의도치 않게 내 표정도 부드러워진다. 지금 이 감정의 진동만큼은, 어떤 프로토콜도 완전히 수치화하긴 어렵다는 걸 절감한다.

바깥의 복도 등불이 한 번 더 짧게 깜빡인다. 그에 맞춰 실험실의 빛은 더욱 낮아지고, 방 안 온도는 조용하게 내려앉는다. 3071-B는 유리창에 이마를 아주 가볍게 기대었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힘내 듯 짧게 고개를 든다.

“혹시…” 그녀가 말끝을 망설인다. “…지금처럼 그냥—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은 채 남을 수 있을까요, 이 느낌이?”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호소였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네. 여기 남는 모든 건, 당신이 원하면… 오직 우리만 알고 있을 수 있어요.” 목소리는 바닥에 가깝게 가라앉는다. 내 속의 두려움과 바람이 뒤섞여, 말투에 잔잔하게 실린다.

그 답을 들은 3071-B는 눈을 한번 크게 깜빡인다. 어둡고 고요한 공간에 단 하나의 부드러운 미소가, 잠시라도 유리 위에 머무른다.

문 밖에서는 손잡이의 작은 움직임이 한 번 더 이어진다—아직 결정되지 않은 방문, 미결의 기운. 실험실의 공기는 더욱 얇고 팽팽하게 긴장감을 머금는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그녀 역시—

이 순간만큼은,

밖의 대기와 통제를 잊고

오직 방 안을 감싸안는 조용한 숨결에

조금 더 오래 머물러 있기로 한다.

이런 분위기 속,

실험실 마지막 구조적 적막은

아직 야금야금 무너질 듯,

그러나 끝내 완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누구도, 쉽게 그 다음 말을 터트리지 않은 채

이 작은 고요와 남은 진동을

조심스럽게 이어가고 있었다.한참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복도의 인기척과 실험실 내부의 잔열이 동시에 스며들고, 3071-B는 천천히 이마를 유리창에 바짝 댄다. 그 자리에 투명한 숨결 자국이 아주 살짝 남았다가, 차가운 표면에 금세 희미해진다. 나는 책상 한쪽에 내려둔 태블릿과 그녀의 사이, 그려지지 않는 단 한 칸 거리를 온전히 의식한다.

3071-B는 숨을 가다듬고, 언뜻 망설이다가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박사님, 제가… 내가 정말 바꾸고 싶은 건, 사실 이 두려움이 아니에요.” 처음으로, 감정을 붙들고 있던 부분이 작게 노출된다. 그녀의 눈빛엔 이전보다 더 명확해진 무언가—아마, 결심에 가까운 빛이 담겨 있다.

나는 대답 대신,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되 유리벽을 두고 멈춘다. 두 손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밀었고, 내 손등에 맺힌 미세한 땀방울이 조명을 오래 타고 흐른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장 지키고 싶나요?” 이번에는 기록용 질문이 아니다. 내 말은 비로소, 의무감이 아닌 연대처럼 무겁지 않게 다가간다.

3071-B는 유리 위에 올려진 자신의 손 위에, 또 다른 손을 포갠다. 그 무엇보다 솔직하게, 방금 내뱉은 단어가 안쪽에서 자라는 듯하다. “제 안에 남아 있는… 아직 다 믿어지지 않는, 사랑 같은 거요. 이게 진짜라면, 지킬 수 있도록…” 목소리가 더 작아지지만, 더는 숨기려 들지 않는다.

실험실 조명은 어느새 거의 밤빛에 가까운 정도로 저물고, 패널 곡선 위 작은 파동이 다시 한 번 미묘하게 떠오른다. 그 순간, 복도 방향에서 송하윤 소장의 미세한 한숨 소리—차가운 결심과 묵직한 단념이 섞인 짧은 기색이 새어나온다. 그녀의 그림자가 문틈에 잠깐 머물다, 실험실 바닥에 아주 천천히 번진다.

방 안의 분위기는, 어느 쪽도 쉽사리 허물지 못하는 경계에 머문 채, 3071-B의 마지막 말이 오래도록 맺혀 있었다. 내 손끝에도, 그리고 이 공간 전체에도, 한 번도 완전히 정의된 적 없던 감정의 미묘한 기류가 고요히 스며들었다.

아직 아무도, 이 다음 행동이나 결정을 뚫고 들어갈 용기를 쉽게 꺼내지 못한 채—

저마다의 내면에 묻어둔 진동만이

실험실의 심장처럼

은근히, 그러나 세차게

방 안을 서서히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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