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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kie.rebel
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밤이 끝없이 펼쳐진다. 눈부신 빛과 짙은 어둠이 얼룩진 채 서로를 파먹고 있었다. 나는 한 손에 위스키 잔을 든 채 펜트하우스 거실 소파에 반쯤 기댄 자세로, 건너편 창문을 노려봤다. 바닥은 매트하게 광이 난 대리석이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아직 남아있었다.
클래식 음악 한 곡이 조용히 공간을 채웠다. 쇼팽의 녹턴, 아마도 Op.9 No.2. 전날 촬영했던 사진기 렌즈가 저쪽 테이블 위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아직도 렌즈 틈엔 내 손가락의 지문이 남아 있을까. 나는 이유 없는 질문을 내 안에서만 맴돌게 내버려 뒀다.
잔을 입술에 대며, 잠깐 눈을 감았다. 불투명한 생각들이 천천히 속으로 스며든다. 몸 한구석이 늘 긴장된 채, 나 자신조차 방심이 두려워진다. 서른셋.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는 무엇을 얼마나 버렸을까. 약점은 곧 패배로 이어진다. 그건 내 안에서 겨울처럼 움직였다. 매 순간, 불필요한 감정선을 꺾어야만 했으니까.
이곳, 도시는 내 전장이다. 저 빛의 물결 아래에서 누가 미소 짓고, 누가 칼날을 숨기고 있을지—머릿속을 맴도는 이름들이 있었다. 내 조직, 이제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병영. 나는 그 한가운데서 명령을 내리고, 사람의 눈빛에서 제각기 무늬진 욕망을 읽는다. 이곳에서 신뢰는 영원하지 않다. 배신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예의 바른 침묵처럼 스며든다.
"유진, 강해져야 살아. 누구도 네 등을 막아주지 않아."
어린 시절, 그 목소리가 아직 귓속을 파고든다.
한밤중의 정적이 익숙하게 다가올 즈음, 테이블 위 스마트폰이 무음으로 진동했다. 화면엔 메시지 하나, 보안프로그램 아이콘 뒤에 가려진 짧은 알림.
익숙한 패턴. 적어도 세 번 짧게, 두 번 길게 진동하는 이 리듬. 조직 내부 고위 계층만이 쓰는 비밀 프로토콜이었다.
나는 순간 반사적으로 허리를 펴고, 오른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쳐 올렸다.
‘내부 보안망 강화. 외부 인원 및 디지털 감시 전방위 확장 중. 일부 구역 사고 의심. 2차 접근 불허. 조심해.’
불쾌하게 목덜미가 당긴다. 나는 잠깐동안 파일럿 라이트처럼, 스스로를 내부에서부터 재점검한다.
조직은 의심이라는 연료로 굴러간다. 누군가가 소문 한 조각만 흘려도, 수십 개의 눈과 귀가 나를 노려본다.
잔을 내려놓다 손끝이 잠깐 떨릴 뻔했다. 나는 재빨리 손등을 무릎에 붙여 고요함을 되찾았다.
"흥, 늘 그래왔다고, 유진."
작게 한숨을 삼키며, 등 뒤로 바싹 기댔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피아노 선율이 느리게 흘렀다. 침묵 속에 아주 잠깐, 쓴 나의 미소가 스쳤다.
오늘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비밀번호로 잠긴 스마트폰을 다시 뒤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어딘가 먼 시점에서부터 시작된 내 무의식이, 오늘 밤을 유독 둔중하게 만들어 놓았다. 도시의 불빛이 유리창 너머로 흐릿하게 출렁인다. 빛과 그림자가 움직일 때마다, 그 아래 숨은 사람들의 마음도 함께 일렁인다.
나는 상반신을 들어올려, 다소 무겁게 늦은 밤의 공기를 들이켰다. 이곳엔 항상 바람이 오르지 않는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 무게감 있는 가죽 소파, 그리고 완벽하게 정돈된 침묵. 모든 사물이 따뜻하기보단,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냉정했다. 이 집이 나를 닮아간 탓일까. 또는 그 반대일까.
무음의 방 안에서 또 다른 기척이 퍼졌다. 현관 쪽, 아주 미세하게 자물쇠가 돌아가는 소리. 아무에게도 노출될 수 없는 출입 코드를 입력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요새 안에 몇 되지 않는다. 나는 위스키 잔을 테이블에 살짝 밀고,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았다. 습관처럼, 척추 아래 숨겨진 본능이 어둠 속에서 반복된다.
현관문이 조용히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비앙카 로마노—날카로운 하이힐 소리, 겹겹의 어둠을 뚫는 금속성 향수, 그리고 그 특유의 세련된 발걸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이 시간에 온다는 연락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잠시의 정적. 창밖의 도시가 한층 더 멀어지는 기분. 비앙카는 천천히 내 시야에 들어오며, 창가와 소파 사이 어딘가 경계에 선다. 그녀 특유의 어깨선, 침착하게 정돈된 콧날 위로 미소 아닌 미소가 그려진다.
“서프라이즈엔, 늘 반가움 말고도 불안이 깃드는 법이지,” 그녀가 답했다. “오늘 밤의 음악 선택도, 분위기에 잘 어울리더군.”
나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나를 관찰하러 온 건지 단정지을 수 없다.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가만히 등받이에 기댄다.
“혹시—조직에서 무슨 이상 징후라도 있었나?” 비앙카의 눈동자가 내 손끝, 그리고 테이블 위 스마트폰을 한번 스친다. 아무렇지 않게 묻는 듯한 톤. 하지만 그 속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숨겨져 있다.
나는 짧게, 고개를 돌렸다.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쇼팽의 피아노가 밤공기와 유리창을 타고 퍼져간다. 이 침묵마저 일종의 전략이라는 듯, 나는 그녀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본다.
“이 도시에 진짜 안전지대가 있다는 생각, 아직도 믿어?” 나는 천천히,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비앙카는 흐릿하게 웃으며, 손끝으로 창문을 따라 유리의 결을 쓸었다. 그리고는 내 쪽을 바라본다. 우리 사이에는 여전히 한 겹의 숨 막히는 공기와, 풀리지 않은 메시지, 아직 밝히지 않은 감정이 맴돈다.
나는 알았다. 이 밤은, 더 길어질 것이다.비앙카가 창가에 멈춰 선다. 희미한 조명이 그녀의 윤곽을 길게 드리우고, 짧은 순간, 그녀의 그림자가 내 쪽으로 스며든다. 그녀는 핸드백을 조용히 바닥 옆 소파 곁에 두고, 예의 그 세련된 제스처로 손끝을 가볍게 턴다. 손목 위로 얇은 시계줄이 미세하게 빛난다.
“안전지대란…” 그녀가 낮고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환상이라고 보지. 특히 이런 곳에서라면.”
우린 서로를 향해 일말의 거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대화는 늘 이중의 의미로 이어진다. 나는 그녀의 손끝이 유리창을 따라가던 그 궤적을 머릿속에 그리며, 위스키 잔을 다시 쥔다. 잔이 손에서 손가락으로 미묘하게 미끄러지지만, 이미 익숙한 균형 감각으로 놓치지 않는다.
“오늘밤, 흥미로운 소식이 들려왔어.” 비앙카가 내 어깨 너머에 시선을 곁눈질로 남긴다. “본부 쪽에서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더군. 누군가, 바깥에서 오래 숨어 있던 정보가 스며들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나는 눈동자를 내리깔며, 물음표 없이 흘려보았다. “누군가라.” 부드러운 공기 속에 겨우 터지는 말. “그 누군가가, 혹시 널 가리키는 건가?”
비앙카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눈동자가 아주 짧게 내 손목, 그리고 네 번째 손가락의 작은 흉터를 훑어간다. "내가 모르는 정보라면, 지금쯤 여기까지 오지 못했겠지."
고요한 쉼표처럼 시간이 흐른다. 내 안의 긴장과 외면의 무욕한 태도가, 잠깐의 마찰을 남긴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나와 마주 앉는다. 소파는 두 사람 사이에 일정한 긴장감을 남긴 채, 부풀어 오른 악보처럼 미묘하게 울린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그 사이, 창밖의 네온 불빛이 유리에 얼비친 우리의 얼굴을 비뚤게 뒤섞는다. 도시의 밤, 그리고 이 방의 침묵이, 이제 첫 단추를 끼우려는 듯 세차게 깨어나고 있다.
“진짜 소식이 궁금하면,” 비앙카가 조용히 속삭인다, “오늘밤, 잠시 더 나와 함께하라고. 이 도시에선 밤이 깊을수록 드러나는 것들이 있잖아.”
그 순간, 내 심장이 아주 작은 경고처럼 박동한다. 대답 대신 나는 짧게 눈을 맞춘다. 그녀가 방금 건네준 말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웠고—그래서 더 위험했다.
창밖의 빛, 방 안의 어둠, 그리고 서로를 시험하는 거리.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이 밤에, 우리는 각자 숨겨둔 무기를 손끝에 감춘다.
비앙카의 시선이 내 입술에 아주 짧게 머문다. 나는 몸을 미세하게 앞으로 기울인다.
“그럼—어디까지 함께할 생각이지?”
대답 없는 순간, 이 방의 공기는 한층 더 짙게 가라앉았다.비앙카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더니, 무릎을 꼬고 앉아 나지막이 웃는다. 그 미소 속에는 알 수 없는 무게가 숨어 있었다. 그녀는 결코 손을 먼저 내밀지 않는다—상대에게 원하는 것을 맡기고, 끝까지 상대의 선택을 지켜보는 쪽이다.
“이럴 땐 서두르지 않는 게 좋겠지. 우린 둘 다, 어설픈 약속이나 장담이 위험하단 거 잘 아니까.” 부드러운 음성에 소파의 가죽이 바스락, 조용히 한 번 더 속삭인다.
나는 그녀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 대신, 시선을 빼앗긴 듯 테이블 위의 카메라 렌즈를 손끝으로 미끄러지듯 굴린다. 카메라, 기억이 담긴 작은 기계. 렌즈에 찍히는 장면은 변하지 않지만, 보는 이는 언제든 달라진다. 이 밤, 비앙카의 눈빛에도 그런 굴절이 있다.
“이 도시에서…”, 내가 천천히 이어간다. “약점이란 건, 애초에 숨기려 들수록 깊어지지.”
비앙카가 내 눈동자에 다시 조용히 초점을 맞춘다. 실내를 가른 긴 침묵 끝, 그녀가 살며시 손목을 틀어 시계를 본다. 금색 바늘이 두 번, 짧게 떨린다.
“내가 묻고 싶었던 건—혹시, 요즘 누가 널 이상하게 쳐다본다든가. 네 주변에서 자꾸 어느 방향이 그림자를 드리운다든가… 그런 감촉, 못 느꼈는지.” 그녀의 목소리엔 은근한 경계와 걱정, 그리고 기묘한 친밀감이 얹히기 시작한다.
나는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는다. 이 순간, 그녀가 진짜로 내 걱정을 하는 건지, 아니면 내 반응을 떠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사방에서, 빛과 어둠처럼 진실과 거짓이 동시에 밀려온다.
“그런 그림자는 늘 따라다녀.” 나는 말끝을 흐리며, 손에 든 잔을 가볍게 기울인다. 위스키가 차가운 유리를 타고 천천히 흐른다.
비앙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손끝이 내 쪽 잔 아래로 슬며시 다가온다. 닿을 듯, 닿지 않게, 위태로운 그 거리가 우리 사이의 모든 긴장으로 응고된다.
“그럼, 오늘 밤엔… 그림자가 아닌 나와, 한 잔 더 하는 건 어때?”
비앙카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사이, 어딘가에서 쇼팽의 피아노가 한 박자 느리게 짙어졌다.
나는 잔을 들어, 그녀의 눈을 깊숙이 겨눈다. 침묵 속에서, 앞으로 닥쳐올 밤의 진짜 이야기가 문득 입술 끝에 맺힌다.
거실의 불빛이 점점 더 낮아지고, 바깥 저편 도시의 네온은 유리 위로 흐려진 채 춤을 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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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계약 연애
금단의 계약 연애의 스토리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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