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의 밤3
stately Yellow-billed Spoonbill 88
작업실 창문엔 비가 흐트러지듯 내려앉고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 나무 바닥 위로 번지는 옅은 물감 냄새가 미미하게 퍼졌다. 작은 탁자 위에서 미라는 차가 식어가는 걸 바라만 봤다. 나는 드로잉보드 위에 고개를 파묻은 채, 붓을 손끝으로 돌리다 말고 문득 옆에 앉은 미라의 시선을 느꼈다.
“어디까지 그린 거야?”
미라가, 평소 상담실에서보다 조금 느슨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끝에 미묘한 망설임이 묻혀 있었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했어.”
숨을 내쉬면서, 컵을 잡기도 전에 손톱을 무심하게 만지작거렸다. 미라가 내 오른손 동작을 따라 집요하게 눈길을 주고 있는 걸, 못 알아챈 척했다.
“슬럼프라며. 날 부른 건... 조금이라도 달라지길 기대해서야?”
내가 붓끝에 힘을 주며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침묵이 더 깊었다. 바깥에서 타닥거리는 빗소리가 몸 안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세현.”
미라가 내 이름을, 오래된 기록을 꺼내는 것처럼 불렀다. “익숙함이 오히려 힘든 적... 있어?”
나는 말을 잘라 삼키고, 다시 눈을 떴다.
“내가... 네 앞에서 뭔가 다 보여줬다는 느낌은 들어. 근데, 그게 편하기도 하고, 또 좀 무서워. 뭘 해도 네가 눈치챌 것 같아서...”
입술 위로 잠깐 손톱이 닿았다. 불편한 듯 미라가 무릎을 꼼지락거렸다.
“넌 늘 아는 척은 잘 해도, 사실 속마음은 잘 안 보여줘.”
말끝이 살짝 떨렸다. 그녀가 그러던 손가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 역시 오늘은 감정적 방어선을 잃어버렸다는 기분이 들었다.
“익숙하다는 게, 진짜 좋은 건지, 그냥 안전해서 버티는 건지 잘 모르겠어.”
침묵이 길어졌다. 나는 미라의 시선을 외면하지 못하고, 드로잉보드를 살짝 밀었다.
“네가 있으면... 내 그림에도 이상한 혼란이 생기는 것 같아. 근데 그게 싫지는 않아서 더 위험하고.”
미라는 뭔가 말하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창문 너머로 빗물이 또각이고, 우리가 만든 조용함을 더 무겁게 했다.
그녀가 컵을 들어 보였다. 손끝에 힘이 미묘하게 들어가 있었다.
“혹시... 나 때문에 그림이 망가질까 봐 불안해?”
평소답지 않게, 속내를 드러내는 질문이었다.
나는 곧장 답하지 못했다. 손바닥을 조용히 펴 보면서, 목에 걸린 무겁고 수상한 감정을 만졌다.
“그런 적 있었어. 근데 솔직히, 네가 아니면 이런 혼란도 없을 것 같거든.”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미라는 내가 다시 붓을 잡는 걸 바라보며, 한 번 말없이 숨을 들이마셨다.
“나 있으면, 조금은 버텨볼 만하지?”
수줍은 목소리. 내 기억 속 미라의 결벽증 같은 태도와는 달랐다.
“생각보다 많이, 그래. 너 없으면... 그냥 지겨웠을지도.”
내가 말을 끝내자, 미라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뭔가 저 멀리서 쏟아지는 빗줄기처럼, 예상 외의 따뜻함이었다.
나는 슬쩍 드로잉보드를 미라 쪽으로 밀었다.
“니가 좋아하는 색, 한 번 골라줘. 오늘은 네 소원대로 할게.”
미라가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의 눈동자 속에 묘하게 흔들리는 그림자가 섞였다.
“나중에, 내 얘기도 들어줄 수 있어?”
담담한 듯하지만, 쓸쓸함이 묻어나는 질문이었다.
“알겠어. 약속이니까.”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결 낮고, 조심스러웠다.
밖에서는 비가 조금 더 거세졌다. 작업실 공기 속에, 우리의 감정은 넓게 번지고 있었다.미라는 잠깐 아무 말 없이, 파스텔이 흩어진 작은 트레이 위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연베이지와 짙은 회색 사이를 망설이다가, 부드러운 연한 올리브 그린을 집는다. 그 과정이 묘하게 조심스럽고, 아주 약간의 망설임이 스며 있었다.
“이 색—네 그림에선 조금 낯설지 않아?”
미라가 내 쪽으로 파스텔을 밀며 물었다. 나는 어깨를 천천히 들썩이고 입꼬리를 한 번 올렸다.
“그래서 네가 고르라 한 거야. 오늘은 좀 낯선 게 필요해.”
큼지막한 화지 위, 아직 본격적으로 채색이 시작되지 않은 여백에 파스텔 조각이 적막하게 놓였다.
미라는 팔을 조심스레 접어, 턱 아래로 가져갔다. 몇 초간 침묵이 다시 우리를 스치다가, 그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세현,”
평소의 단단함 따위 없는, 다만 조용한 숨 같은 목소리였다.
“가끔은... 내 얘기 너무 오래 가둬두는 것 같은 기분 들어. 오늘, 소원은 간단하게—내 얘기, 한 번만 진짜로 들어줘.”
실은 마주보지 않고, 시선이 한쪽 구석을 스칠 뿐.
나는 그 말에 어색하게 웃음이 섞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가슴 한쪽이 쿡 찔리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그녀가 고른 올리브 그린을 손에 쥐고, 마른 붓끝으로 화지 위에 아주 작은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스텔 먼지가 손가락에 스며드는 감각이 단순히 이물감만은 아니었다.
미라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언제든 괜찮아. 네 얘기, 내가 듣는 거 오늘 소원으로 할게.”
상투적인 말도, 농담도 애써 삼켰다.
공기 중에 잠깐, 내뱉지 않은 말과 무게가 서로 어울렸다.
밖의 빗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는 동안, 미라는 손끝으로 식은 찻잔을 다시 돌려 잡았다.
입술이 아주 가볍게 떨릴 만큼 망설이다가, 결국 내 쪽을 바라봤다.
“세현, 그럼 혹시... 네가 내 얘기 듣다가, 조금은 불편해져도 돼?”
그 느린 질문 끝에, 창문 너머 번개라도 치는 듯, 어딘가 공기에 금이 갔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올리브 그린 조각을 손위에 꼭 쥐고 미라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아주 작은 침묵―무엇이 나오려는지 모를 예감만이 우리 사이에서 크게 진동했다.

소원의 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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